여호와를 섬기며 놀라운 일들을 경험한 한평생
체험담
여호와를 섬기며 놀라운 일들을 경험한 한평생
에릭 베버리지와 헤이즐 베버리지
“이에 피고에게 징역 6개월을 선고한다.” 이러한 말이 귓전에 울리는 가운데, 나는 영국 맨체스터에 있는 스트레인지웨이스 교도소로 호송되었습니다. 때는 1950년 12월이었고, 당시 내 나이는 열아홉이었습니다. 나는 그때 젊은 시절에 가장 힘들었던 시험 중 하나에 직면했습니다. 군 복무를 거부했던 것입니다.—고린도 둘째 10:3-5.
당시 나는 여호와의 증인의 전 시간 파이오니아 봉사자였으며, 따라서 군 복무가 면제되어야 할 입장이었지만, 영국 법은 우리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감방에 홀로 갇히게 되었습니다. 감방에서 아버지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투옥된 것은 간접적으로 아버지와 관련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교도관이었으며 요크셔 출신으로 강한 신념과 원칙을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군 복무와 교도소 근무 중에 얻은 경험 때문에 가톨릭교에 대해 깊은 반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일찍이 1930년대 초에 증인과 처음으로 만났는데, 집에 찾아온 증인들을 쫓아 보낼 생각으로 문을 열었다가 그들이 준 책 몇 권을 손에 들고 들어왔습니다! 아버지는 나중에 「위안」지(지금의 「깨어라!」)를 예약하여 정기 구독하였습니다. 증인들은 매년 아버지를 방문하여 예약을 갱신하도록 권하곤 하였습니다. 내가 열다섯 살쯤 되었을 때, 증인들은 아버지와 또 한 번 토의를 했으며, 나는 증인들 옆에 앉아 그 토의에 참여하였습니다. 바로 그때 나는 성서 연구를 시작하였습니다.
열일곱 살이던 1949년 3월에 나는 여호와에 대한 헌신의 상징으로 침례를 받았습니다. 같은 해에, 길르앗 선교인 학교를 갓 졸업하고 나이지리아로 떠날 채비를 하고 있던 존 샤룩과 마이클 샤룩을 만났습니다. 나는 그들이 지닌 선교의 영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알게든 모르게든, 내 마음속에 선교의 영을 심어 주었습니다.
성서를 연구하면서, 대학 진학에 대한 관심을 잃게 되었습니다. 집을 떠나 런던에 있는 간접 세무국에서 일한 지 1년도 채 안 되어, 공무를 수행하는 일을 계속한다면 하느님에 대한 나의 헌신을 이행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직장을 그만둘 때, 그곳에서 오래 일한 한 선배는 내가 “영혼을 파괴하는 직장”을 떠나는 것에 대해 축하의 말을 해 주었습니다.
그 일이 있기 전에 나는 또 하나의 시험에 직면하게 되었는데, 그 시험이란 아버지에게 세속 직업을 그만두고 전 시간 봉사자가 되고 싶다는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휴가차 집에 가 있던 어느 날 저녁, 나는 폭탄선언을 하였습니다. 아버지가 당연히 감정이 폭발하여 심한 말을 퍼부을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아버지는 이러한 말밖에는 하지 않으셨습니다. “네가 그렇게 결정했다면, 네 뜻대로 하거라. 하지만 일이 잘 안 되더라도 내게 도움을 청해서는 안 된다.” 1950년 1월 1일에 쓴 내 일기에는 이러한 말이 있습니다. “아버지께 파이오니아 봉사에 대해 말씀드렸다. 아버지께서 꽤 호의적인 태도를 나타내시다니 믿기지 않았다. 아버지의 친절함에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나는 공무원 직을 사직하고 전 시간 파이오니아 봉사 임명을 받아들였습니다.
“작은 집”에 살면서 봉사하라는 임명
그 후에 하느님에 대한 나의 헌신이 또다시 시험을 받게 되었습니다. 나는 웨일스 출신의 동료 그리스도인인 로이드 그리피스와 함께 랭커셔에 있는 한 “작은 집”을 함께 쓰면서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라는 임명을 받았습니다. 그 작은 집에 대한 상상과 꿈에 부푼 채로, 내리는 비에 흠뻑 젖어 있는 베이컵이라는 쓸쓸한 마을에 도착하였습니다. 그 작은 집이 사실은 지하실이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 퍼뜩 정신이 들었습니다! 밤이면 쥐와 바퀴 벌레가 우리의 친구가 되어 주었습니다. 거의 마음을 바꾸어 집으로 돌아갈 뻔하였습니다. 하지만 소리 없이 기도하면서 이 시험에 맞설 수 있는 힘을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갑자기 평화가 나를 감싸는 것이 느껴졌으며, 나는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곳은 여호와의 조직이 내게 준 임지였습니다. 나는 도움을 얻기 위해 여호와를 신뢰해야 하였습니다. 그 임명에 계속 고착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아마 그만두었다면 내 인생이 완전히 달라졌을 것입니다!—이사야 26:3, 4.
나는 당시 경기가 침체되어 있던 로선데일밸리에서 약 9개월간 전파하다가, 군 복무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스트레인지웨이스 교도소에서 2주를 보낸 뒤에, 영국 남부 해변에 있는 루이스 교도소로 이감되었습니다. 마침내 다섯 명의 증인이 그곳에서 함께 지내게 되었으며, 우리는 감방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의 기념식을 치를 수 있었습니다.
한번은 아버지가 나를 접견하러 왔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아버지의 자존심에 시험이 되었을 것입니다. 잘 알려진 교도관이 감옥에 갇힌 아들을 보러 오다니 말입니다! 나는 아버지의 접견에 대해 언제까지나 감사할 것입니다. 마침내 1951년 4월에 나는 석방되었습니다.
나는 루이스 교도소에서 석방된 다음, 기차를 타고 웨일스의 카디프로 갔습니다. 당시에 아버지는 그곳에 있는 교도소에서 교도소장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네 자녀—아들 셋과 딸 하나—중 맏이였습니다. 파이오니아를 하면서 자신을 부양하기 위해 시간제 직업을 구해야 하였습니다. 옷 가게에서 일을 하였지만, 내 인생의 주된 목적은 그리스도인 봉사의 직무를 수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무렵, 어머니는 우리를 버리고 떠났습니다. 당시에 나이가 여덟 살에서 열아홉 살이었던 우리들과 아버지에게 그것은 큰 충격이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부모는 이혼하였습니다.
좋은 아내를 만나다
내가 속한 회중에는 몇 명의 파이오니아가 있었습니다. 파이오니아들 중에는 자매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는 직장에도 나가고 전파 활동도 하기 위해 탄광 지역인 론다밸리에서 매일 카디프로 왔습니다. 그 자매의 이름은 헤이즐 그린이었으며, 매우 훌륭한 파이오니아였습니다. 헤이즐은 나보다 몇 년 먼저 진리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의 부모는 일찍이 1920년대부터 성경 연구생(지금은 여호와의 증인으로 알려짐)의 집회에 참석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내가 직접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나는 1944년에 「광풍을 거두는 종교」(Religion Reaps the Whirlwind)라는 소책자를 읽기 전까지는 성서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나를 설득하여 카디프에서 열리는 순회 대회에 데리고 갔습니다. 성서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지만, 어느새 나는 공개 강연 광고판을 목에 걸고 대형 쇼핑 센터에 서 있었습니다. 교직자들과 다른 사람들이 괴롭히기는 했지만, 무사히 그 일을 마쳤습니다. 나는 1946년에 침례를 받았으며 그해 12월에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951년에, 감옥에서 이제 막 석방된 한 젊은 파이오니아가 카디프에 나타났습니다. 그가 바로 남편 에릭이었습니다.우리는 함께 전파하러 나갔습니다. 우리는 서로 잘 지냈습니다. 우리는 둘 다 하느님의 왕국 권익을 증진시키겠다는 동일한 인생 목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1952년 12월에 결혼하였습니다. 우리 둘은 전 시간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고 있었고 수입도 변변치 않았지만, 필수품이 부족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때때로, 식료품이나 생활용품 중에 어쩌다가 잼이나 비누를 너무 많이 주문한 증인이 우리에게 선물을 주었는데, 그런 것들이 꼭 필요할 때에 그렇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실용적인 도움에 크게 감사하였습니다. 하지만 더 놀라운 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바꿔 놓은 놀라운 일
우리 부부는 1954년 11월에 뜻밖에 놀라운 우편물을 받았습니다. 런던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의 지부 사무실에서 매주 다른 회중을 방문하는 여행하는 감독자가 되기 위해 작성해야 하는 신청서를 내게 보냈던 것입니다. 우리 부부는 그 신청서가 우리에게 보내진 것은 착오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에 대해 회중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나는 신청서를 작성하여 보냈으며, 우리는 숨을 죽이고 기다렸습니다. 며칠 뒤에 받은 답장에는 “훈련을 받으러 런던으로 오십시오”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런던에 있는 지부 사무실에 가 보니, 당시 스물세 살밖에 안 된 내게는 마치 영적 거인들처럼 보이던 뛰어난 형제들—프라이스 휴스, 에믈린 와인스, 어니 비버, 어니 가이버, 보브 고프, 글린 파, 스탠 우드번과 마틴 우드번 및 그 외의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 내가 함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들 중 대부분은 그 후에 사망하였습니다. 그들은 1940년대와 1950년대에 영국에서 열심과 충절의 튼튼한 기초를 놓았습니다.
영국에서의 순회 활동—지루한 적이 결코 없었다
우리는 1954년에서 1955년으로 접어드는 눈이 많이 내리던 겨울에 여행하는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는 이스트앵글리아로 임명되었는데, 그곳은 북해에서 매서운 바람이 불어오는 영국의 평원 지대였습니다. 당시 영국에는 증인이 3만 1000명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그 첫 번째 순회구에서 힘든 경험을 통해 교훈을 얻었으며, 우리가 방문한 형제들에게도 우리의 방문이 언제나 편안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는 경험 부족과 요크셔 출신 특유의 무뚝뚝함 때문에 때때로 사람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였습니다. 여러 해를 보내면서, 효율보다는 친절이, 절차보다는 사람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배워야 했습니다. 지금도 다른 사람들에게 새 힘을 주었던 예수의 모범을 따르려고 노력하지만, 언제나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마태 11:28-30.
우리는 이스트앵글리아에서 18개월을 보낸 다음, 영국 북동부 타인강 유역의 뉴캐슬과 노섬벌랜드에 있는 순회구에서 봉사하도록 임명되었습니다. 나는 그 경치 좋은 지역에 사는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내게 큰 도움을 준 사람은 미국 워싱턴 주 시애틀에서 지역 감독자로 방문한 돈 워드였습니다. 그는 길르앗 제20기 학급의 졸업생이었습니다. 나는 연설할 때 내용을 쏟아 놓듯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말하곤 하였습니다. 그는 나에게 속도를 늦추고 멈춤을 사용하면서 가르치는 법을 알려 주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바꾸어 놓은 또 하나의 놀라운 일
우리가 1958년에 받은 한 통의 편지도 우리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미국 뉴욕 주 사우스랜싱에 있던 길르앗 학교에 참석하라는 초대를 받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타던 조그만 1935년형 오스틴 세븐 자동차를 처분하고 뉴욕행 배표를 샀습니다. 우리는 우선 뉴욕 시에서 열린 여호와의 증인의 국제 대회에 참석하였습니다. 거기서 온타리오 주 피터버러로 가서 6개월간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다가 길르앗 학교를 향해 남쪽으로 갔습니다.
학교 강사들 중에는 지금은 통치체 성원인 앨버트 슈로더와 그 후에 사망한 맥스웰 프렌드와 잭 레드퍼드가 있었습니다. 14개국에서 온 82명의 학생과 함께 나눈 교제는 매우 격려적이었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문화에 대해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영어와 씨름하는 외국의 학생들과 어울리다 보니, 우리가 다른 언어를 배울 때 무슨 문제들을 겪게 될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5개월이 지나 교육 과정은 끝났고 우리는 27개국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졸업식이 있고 나서 며칠 후, 우리는 유럽으로 돌아가기 위해 뉴욕 시에서 퀸 엘리자베스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첫 번째 해외 임지
우리가 받은 임지는 어디였습니까? 포르투갈이었습니다! 우리는 1959년 11월에 리스본에 도착하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언어와 문화에 적응해야 하는 시험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1959년에 포르투갈에서는 643명의 증인이 활동하고 있었던 반면, 인구는 거의 900만 명이나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전파 활동은 법적으로 인가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왕국회관은 있었지만, 건물 외부에는 아무런 표시가 없었습니다.
우리 부부는 선교인인 엘자 피코니로부터 포르투갈어를 배운 다음, 리스본, 파루, 에부라 그리고 베자 주변에 있는 회중들과 집단들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961년이 되자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나는 주앙 곤살베스 마테우스라는 젊은 남자와 성서 연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병역 문제에 대해 그리스도인 중립 입장을 취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에 나는 경찰 본부로 소환되어 심문을 받았습니다. 또 한번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며칠 뒤에 우리는 30일 내로 포르투갈을 떠나라는 통지를 받았던 것입니다! 동료 선교인들인 에릭 브리튼과 크리스티나 브리튼 부부 그리고 도미닉 피코니와 엘자 피코니 부부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나는 재심을 청구하였으며, 우리는 비밀경찰국장을 만나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떠나 달라고 요구하는 이유를 아주 분명하게 이야기하면서, 내 성서 연구생인 주앙 곤살베스 마테우스의 이름을 대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말은, 영국과는 달리 포르투갈에서는 양심적 병역 거부라는 사치스러운 특혜를 허락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포르투갈을 떠나야 하였으며, 주앙과의 연락은 끊기고 말았습니다. 26년이 지난 후, 새로운 포르투갈 베델의 봉헌식에서 주앙과 그의 아내와 세 딸을 보게 되자 정말 기뻤습니다! 우리가 포르투갈에서 한 봉사가 헛되지 않았던 것입니다!—고린도 첫째 3:6-9.
우리는 다음에 어디로 임명되었습니까? 놀랍게도 이웃 나라인 스페인이었습니다! 우리는 1962년 2월에 눈물을 머금은 채 리스본에서 기차를 타고 마드리드로 향하였습니다.
다른 문화에 적응하다
스페인에서는 비밀리에 진행되는 전파 활동과 집회 마련에 익숙해져야 하였습니다. 전파할 때는 대개 서로 가까이 있는 집을 한 집 이상은 절대로 방문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한 집에서 증거한 후에 다른 거리에 있는 다른 건물로 갔습니다. 그 때문에 경찰—혹은 사제—이 우리를 붙잡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파시스트 가톨릭 독재 정권 하에 있었으며, 우리의 전파 활동이 금지되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외국인인 우리는 신분이 드러나지 않도록 스페인어 이름을 사용하였습니다. 나는 파블로가 되었고, 아내는 후아나가 되었습니다.
마드리드에서 몇 달을 보낸 후, 우리는 바르셀로나에서 순회 활동을 하도록 임명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도시에 있는 여러 회중들을 방문하였으며, 각 회중에서 흔히 2주 내지 3주를 보냈습니다. 각각의 서적 연구 집단을 회중인 것처럼 방문해야 했기 때문에 그처럼 오랜 시간이 걸렸으며, 그로 인해 보통 1주일에 두 집단씩을 방문해야 하였습니다.
예기치 못한 변화
우리는 1963년에 스페인에서 지역 활동을 하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거의 3000명에 달하는 활동적인 증인을 섬기기 위해 전국 각지를 돌며 당시 존재하던 아홉 개의 순회구를 방문하였습니다. 우리는 가장 기억에 남는 얼마의 비밀 순회 대회를 세비야 근처의 숲 속에서, 히혼 근처의 농장에서 그리고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와 로그로뇨 근처의 강가에서 열었습니다.
호별 방문 봉사를 할 때는 예방 조처의 하나로, 인근 거리의 구조를 점검하여 만약 뭔가 잘못되면 어느 길로 빠져나가야 할지를 확인해 두곤 하였습니다. 한번은 마드리드에서 전파할 때 증인 한 사람과 함께 어느 건물의 위층에 있었는데, 갑자기 아래쪽에서 시끄러운 고함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아래층에 내려가 보니 십대 소녀들이 몰려와 있었는데, 그들은 이하스 데 마리아(마리아의 딸들)라는 가톨릭 단체의 회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웃 사람들에게 우리에 대해 경고하고 있었습니다. 그들과는 이성적인 대화가 불가능하였으며, 나는 그곳을 당장 떠나지 않으면 경찰이 우리를 체포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곳을 빠져나갔습니다. 그것도 매우 신속하게 빠져나갔습니다!
스페인에서 보낸 여러 해는 참으로 흥미진진하였습니다. 우리는 그곳에 있는 훌륭한 형제 자매들을 격려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그 중에는 특별 파이오니아 봉사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고 회중을 세우고 강화하기 위해 감옥에 갇힐 위험을 무릅썼으며 흔히 궁핍한 생활을 인내하였습니다.
그 기간 중에는 얼마의 슬픈 소식도 있었습니다. 아내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1964년에는 충실한 증인이었던 어머니가 사망하였습니다. 작별 인사도 한마디 못하고 어머니를 잃게 되어 무척 슬펐습니다. 그것은 선교 활동에 따르는 대가 중의 하나였으며, 다른 많은 선교인들도 그러한 대가를 치렀습니다.”
마침내 자유
여러 해 동안 박해를 받은 후에, 우리의 활동은 1970년 7월에 마침내 프랑코 정부로부터 법적 인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왕국회관이 최초로 마드리드에 그리고 두 번째로 바르셀로나의 레셉스에 생기게 되어 우리 부부는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왕국회관에는 언제나 큰 간판이 내걸렸으며, 간판은 흔히 광택이 나는 재료로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여호와의 증인이 합법적이며 스페인에 계속 머물러 있을 것임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습니다! 때는 1972년이었으며, 당시 스페인에는 거의 1만 7000명의 증인이 있었습니다.
그 무렵, 영국에서 매우 격려적인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아버지는 1969년에 스페인에 있던 나를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스페인의 증인들이 자신에게 베풀어 준 호의에 크게 감명을 받은 나머지, 영국에 돌아가서 성서 연구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1971년에 나는 아버지가 침례를 받았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우리 부부가 고국에 갔을 때, 그리스도인 형제가 된 아버지가 내게 식사에 대한 감사의 기도를 해 달라고 부탁한 순간은 참으로 감격스러웠습니다. 나는 그러한 날이 오기를 20년도 넘게 기다렸습니다. 남동생 보브와 그의 아내 아이리스는 1958년에 증인이 되었습니다. 보브의 아들인 필립은 아내인 진과 함께 현재 스페인에서 순회 감독자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그 부부가 그토록 멋진 나라에서 봉사하고 있는 것을 보는 것은 정말 기쁜 일입니다.
가장 최근에 있었던 놀라운 일
1980년 2월에, 한 통치체 성원이 지구 감독자로 스페인을 방문하였습니다. 놀랍게도, 그는 나와 함께 봉사를 하고 싶어하였습니다. 그가 나를 지켜보려고 그러는 것인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그 해 9월에 우리는 뉴욕 브루클린에 있는 세계 본부로 옮기라는 초대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놀라서 어안이 벙벙하였습니다. 스페인에 있는 형제들과 헤어지는 것은 가슴 아팠지만, 우리는 초대를 받아들였습니다. 당시 스페인에는 4만 8000명의 증인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떠날 때, 한 형제는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시계를 내게 선물로 주었습니다. 그 시계에는 두 개의 성구 즉 누가 16:10과 누가 17:10이 스페인어로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 형제는 그 성구들이 나의 주제 성구라고 말했습니다. 누가 16:10에는 우리가 작은 것에 충실해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어 있으며, 누가 17:10에서는 우리가 “아무 쓸모 없는 종”이며 따라서 자랑할 이유가 없다고 알려 줍니다. 나는 우리가 여호와를 섬기면서 무슨 일을 하든 그것은 헌신한 그리스도인인 우리의 의무일 뿐이라는 것을 항상 깨닫습니다.
건강과 관련된 놀라운 일
1990년에는 심장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결국 막힌 동맥을 열기 위해 스텐트를 삽입해야 하였습니다. 몸이 약해져 어려웠던 그 시기에 아내는 여러 가지 면으로 나를 지원해 주었으며, 종종 내가 너무 힘이 없어서 들지 못하는 가방이나 여행 가방을 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다가 2000년 5월에 심박조율기를 삽입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몸이 훨씬 좋아졌습니다!
지난 50년 동안, 우리 부부는 여호와의 손이 짧지 않다는 것과 그분의 목적은 우리가 정한 때가 아니라 그분이 정하신 때에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사야 59:1; 하박국 2:3) 우리는 평생 살아오는 동안 기쁨을 주는 많은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였고 얼마의 슬픈 일들도 겪었지만, 그동안 내내 여호와께서는 우리를 붙들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곳 여호와의 백성의 세계 본부에서 통치체 성원들과 매일 접촉하는 축복을 받고 있습니다. 나는 때때로 ‘내가 정말 이곳에 있단 말인가?’ 하고 자문해 봅니다. 이곳에 있는 것은 과분한 친절입니다. (고린도 둘째 12:9) 우리는 여호와께서 사탄의 간계로부터 우리를 계속 보호하고 지켜주셔서, 그분이 의로운 통치권을 땅에 행사하실 날을 누리게 하실 것임을 확신하고 있습니다.—에베소 6:11-18; 계시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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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 수감되었던 맨체스터의 스트레인지웨이스 교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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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 순회 활동을 할 때 우리가 타던 오스틴 세븐 자동차 옆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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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마드리드의 세르세디야에서 열린 비밀 대회, 196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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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클린에 있는 성서 출판물 전시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