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험기
다른 사람들이 관심을 보여 준 덕분에 평생 유익을 얻다
“성공회에서는 진리를 가르치지 않아. 다른 데서 진리를 찾아 보렴.” 성공회에 다니던 할머니의 이 말씀을 듣고 어머니는 참종교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여호와의 증인과는 이야기하려 하지 않았고 증인들이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우리 집을 방문했을 때 나한테 집에 없는 척하라고 말씀하셨어요. 하지만 1950년에 작은 이모가 증인들과 성서 연구를 시작하자 어머니도 함께 연구했습니다. 어머니와 이모는 이모 집에서 연구를 했고 나중에 침례를 받았죠.
아버지는 캐나다 연합 교회의 장로였어요. 그래서 나와 여동생을 매주 주일 학교에 보내셨습니다. 우리는 주일 학교를 마치면 아버지와 함께 오전 11시 예배에 참석했어요. 오후에는 어머니와 왕국회관에 갔죠. 그래서 두 종교의 차이를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새로 알게 된 성경 진리를 오랫동안 가깝게 지내던 허치슨 부부에게 알려 주었고, 그들도 여호와의 증인이 되었죠. 1958년에 허치슨 부부는 자신들의 세 아들과 나를 데리고 뉴욕시에서 8일간 열린 “성의” 국제 대회에 참석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분들이 그 여행에 나를 데려가느라 정말 많은 수고를 하셨죠. 하지만 그 대회는 내 삶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형제 자매들의 관심 덕분에 좋은 영향을 받다
나는 십 대 시절을 농장에서 보냈기 때문에 가축을 돌보는 걸 좋아했어요. 그래서 수의사가 되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했습니다. 어머니는 회중 장로에게 그 점을 이야기하셨죠. 그 형제는 우리가 “마지막 날”에 살고 있다는 점을 친절하게 일깨워 주면서, 여러 해 동안 대학 교육을 받는 게 내가 여호와와 누리는 관계에 어떤 영향을 줄지 생각해 보라고 하셨어요. (디모데 후서 3:1) 결국 나는 대학에 가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 무슨 일을 해야 할지 계속 고민이 되었어요. 매주 야외 봉사에 참여하기는 했지만 봉사가 별로 재미없었고 파이오니아가 되고 싶은 생각도 없었죠. 그 무렵, 믿지 않는 아버지와 삼촌이 나에게 토론토의 유명한 보험 회사에서 직장 생활을 해 보라고 권하셨어요. 삼촌이 그 회사에서 중요한 직책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나는 토론토에서 야근을 많이 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과 자주 어울리면서 영적 활동을 소홀히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할아버지와 함께 살았는데 할아버지는 증인이 아니셨죠.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살 집을 다시 구해야 했습니다.1958년에 나를 대회에 데리고 갔던 허치슨 부부는 나에게 부모님과 같은 분들이었습니다. 그분들은 나를 자신들의 집에서 살게 해 주셨고 내가 영적으로 발전하게 도와주셨죠. 1960년에 나는 그들의 아들인 존과 함께 침례를 받았습니다. 존이 파이오니아를 시작하는 걸 보면서 나도 봉사를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회중 형제들은 내가 영적으로 발전하는 걸 눈여겨보았고, 나중에 나는 신권 전도 학교의 종 a으로 일하도록 임명되었습니다.
훌륭한 배우자를 만나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하다
1966년에 나는 랜디 버그와 결혼했습니다. 랜디는 열심 있는 파이오니아였고 도움이 더 필요한 곳에서 봉사하고 싶어 했죠. 한 여행하는 감독자는 우리 부부에게 관심을 보이며, 온타리오주 오릴리아에 있는 회중을 도우라고 권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짐을 싸서 그곳으로 이사했습니다.
오릴리아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아내를 따라 정규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아내의 열정에 큰 영향을 받은 거죠! 파이오니아 봉사에 전념하면서, 성경을 사용해 전파하고 사람들이 진리를 깨닫게 돕는 기쁨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오릴리아에서 한 부부가 생활을 변화시켜 여호와의 종이 되도록 도울 수 있었던 건 정말 큰 축복이었습니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생각을 조정하다
나는 토론토를 방문하던 중에 베델에서 많은 책임을 맡고 있던 아널드 맥너마라 형제를 만났습니다. 형제는 우리 부부가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하기를 원하는지 물어보았죠. 난 즉시 “물론이죠! 퀘벡만 아니라면 어디든 좋습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나는 영어를 사용하는 다른 캐나다 사람들처럼 퀘벡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죠. 그 당시,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퀘벡주에서는 캐나다에서 독립하려는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거든요.아널드 형제가 대답했습니다. “현재 지부에서 특별 파이오니아를 보내는 곳은 퀘벡밖에 없습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퀘벡으로 가겠다고 했습니다. 아내가 그곳에서 봉사하고 싶어 한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거든요. 나중에 깨달았지만 그건 정말 훌륭한 결정이었습니다!
우리 부부는 5주간 프랑스어 수업을 받은 후에 다른 부부와 함께 몬트리올에서 북동쪽으로 540킬로미터가량 떨어진 도시인 리무스키로 갔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프랑스어가 서툴렀어요. 한번은 집회에서 광고를 낭독할 때 실수를 했습니다. 곧 있을 국제 대회에 많은 “오스트리아 대표자들”이 올 것이라고 말해야 하는데 “타조 대표자들”이 올 것이라고 말한 거죠.
리무스키에는 우리 네 사람 외에도 열심 있는 독신 자매 네 명과 위베르도 부부와 그들의 두 딸이 있었습니다. 위베르도 부부는 침실이 일곱 개인 큰 집을 빌렸는데, 파이오니아들이 그곳에서 함께 살면서 집세를 분담했습니다. 그 집의 기둥들과 현관이 흰색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집을 “백악관”이라고 불렀죠. 보통 12명에서 14명이 그 집에 함께 살았습니다. 특별 파이오니아인 우리 부부는 오전이든 오후든 저녁이든 늘 봉사를 나갔는데 추운 겨울 저녁을 포함해 언제든 함께 봉사할 사람이 있어서 정말 좋았습니다.
우리는 그 충실한 파이오니아들과 가족처럼 가깝게 지냈어요. 가끔씩 우리는 모닥불 앞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거나 다양한 재료를 넣어 함께 만두를 만들어 먹었습니다. 한 형제가 악기를 잘 연주했기 때문에 토요일 밤에는 함께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기도 했죠.
리무스키에는 성경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기쁘게도 5년 만에 여러 명의 성서 연구생이 잘 발전하여 침례를 받았고, 회중 전도인 수가 약 35명으로 늘었습니다.
퀘벡에서 우리는 복음 전파자로서 정말 좋은 훈련을 받았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의 봉사를 지원해 주시고 물질적 필요를 채워 주시는 걸 볼 수 있었죠. 또한 우리는 프랑스어와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과 그들의 문화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 덕분에 다른 문화들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죠.—고린도 후서 6:13.
그런데 갑자기 지부 사무실에서 우리에게 뉴브런즈윅주의 동쪽 연안에 있는 도시인 트래커디로 가서 봉사할 수 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우리는 그 말을 듣고 매우 난감했어요. 얼마 전에 새로운 숙소를 계약한 데다 내가 학교에서 시간제 교사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게다가 몇몇 성서 연구생이 이제 막 전도인이 되었고 왕국회관 건축이 한창 진행 중이었습니다.
우린 이 문제에 대해 주말 내내 기도하면서 트래커디를 직접 가 보았습니다. 그곳은 리무스키와는 많이 다른 곳이었죠. 하지만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대로 그곳으로 가서 봉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시험해 보기로 했고 실제로 그분은 문제를 모두 해결해 주셨어요. (말라기 3:10) 이번에도 아내의 강한 영성과 희생적인 태도와 유머 감각 덕분에 새로운 곳에 가서 적응하는 일이 훨씬 수월했습니다.
로버트 로스 형제는 우리가 새로 연합한 회중의 유일한 장로였습니다. 로버트는 과거에 아내 린다와 함께 트래커디에서 파이오니아로 봉사했는데 첫 아이가 태어나면서 그곳에 정착했죠. 우리는 그 부부가 어린 아들을 키우면서도 사람들을 따뜻하게 후대하고 열심히 봉사하는 모습을 보며 큰 격려를 받았습니다.
어디든 필요한 곳에서 봉사하며 많은 축복을 맛보다
우리는 트래커디에서 2년 동안 파이오니아로 봉사한 후에 또다시 예상치 못한 임명을 받았습니다. 여행하는 봉사를 하도록 초대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7년 동안 영어 순회구에서 봉사했고 그 후에 퀘벡주의 프랑스어 순회구로 임명되었죠. 그곳에서 지역 감독자로 일하던 레옹스 크레포 형제는 내 연설을 자주 칭찬해 주었습니다. 그런 다음 항상 이런 말을 덧붙였죠. “내용을 좀 더 실용적으로 다룰 방법이 있을까요?” b 크레포 형제의 이러한 관심 덕분에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내용으로 연설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맡은 임명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1978년에 몬트리올에서 열린 “승리의 믿음” 국제 대회 때 식품 봉사부에서 일한 것입니다. 우리는 8만 명이 참석할 것으로 예상된 그 대회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식품을 제공해야 했습니다. 장비, 메뉴, 음식 준비 방법 등 모든 게 완전히 바뀌었죠. 초대형 냉장고가 약 20개 있었는데 가끔 고장이 났습니다. 또한 대회가 시작되기 바로 전날에 스포츠 경기가 열렸기 때문에 우리는 자정이 지나서야 장비를 설치하러 경기장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아침 식사를 준비하려면 동이 트기 전에 오븐을 달궈야 했는데 말이죠! 정말 피곤했지만 장성한 동료 자원봉사자들이 유머 감각을 잃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며 많은 걸 배웠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도 그들과 가까운 친구로 지내고 있어요. 1940년대와 1950년대에 혹독한 박해가 있었던 퀘벡에서 그처럼 역사적인 대회를 즐길 수 있어서 정말 기뻤습니다!
몬트리올에서 여러 대회가 열리는 동안, 함께 감독자로 일하던 다른 형제들에게서 많은 걸 배웠습니다. 한 해에는 현재 중앙장로회 성원인
데이비드 스플레인 형제가 대회 감독자로 일했습니다. 다음 대회에서 내가 그 책임을 맡았을 때 스플레인 형제가 정말 잘 협조해 주었습니다.나는 아내와 함께 36년 동안 여행하는 봉사를 했습니다. 그 후 2011년에 회중 장로 학교 강사로 일하도록 임명되었죠. 우리는 2년 동안 숙소를 75차례나 옮겨 다녀야 했지만 그러한 희생을 한 보람이 있었습니다. 매주 학급이 끝날 때마다 장로들은 중앙장로회가 장로들의 영성에 매우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걸 느끼며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나중에 나는 왕국 전파자 학교에서 강사로 일했습니다. 학생들 대부분은 빡빡한 일정 때문에 큰 부담을 느꼈습니다. 하루에 약 7시간 정도 앉아서 수업을 듣고, 매일 저녁 3시간 동안 숙제를 하고, 일주일에 네다섯 개의 과제를 준비해야 했으니까요. 나와 또 한 명의 강사는 여호와의 도움 없이는 그 일정을 소화할 수 없다고 학생들에게 설명했습니다. 학생들은 여호와를 의지한 결과 자신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해내면서 놀라워했어요. 그 모습을 잊지 못할 겁니다.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나타낼 때 그 유익은 오래 지속된다
어머니가 사람들에게 관심을 잘 나타내셨기 때문에 성서 연구생들이 영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아버지도 진리에 대해 호의적인 태도를 갖게 되셨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3일 후에 아버지가 공개 강연을 들으러 왕국회관에 오셔서 우린 정말 깜짝 놀랐어요. 아버지는 그 뒤로 26년 동안 계속 집회에 참석하셨지만 침례를 받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래도 장로 형제들의 말에 따르면 매주 집회 때마다 가장 먼저 회관에 오는 분이셨죠.
어머니는 나와 동생들에게도 좋은 영향을 주셨습니다. 세 명의 여동생 모두 남편과 함께 충실히 여호와를 섬기고 있죠. 그중 한 명은 포르투갈 지부에서, 또 한 명은 아이티 지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아내와 나는 현재 온타리오주 해밀턴에서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여행하는 봉사를 하던 시기에는 형제 자매들이 재방문과 성서 연구를 할 때 그들을 따라다니며 즐겁게 봉사했죠. 하지만 지금은 우리의 성서 연구생이 영적으로 잘 발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기쁩니다. 또한 우리는 새로운 회중의 형제 자매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그들이 기쁠 때나 힘들 때나 여호와의 도움을 경험하는 모습에 격려를 받습니다.
지난날을 돌이켜 보면 많은 형제 자매들이 우리에게 관심을 보여 준 것에 깊이 감사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도 다른 사람들에게 “진실한 관심”을 나타내면서 그들이 최선을 다해 여호와를 섬기도록 격려하려고 노력하죠. (고린도 후서 7:6, 7) 예를 들어, 나는 아내와 아들과 딸이 모두 전 시간 봉사를 하는 한 형제에게 혹시 파이오니아 봉사를 생각해 본 적이 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형제는 자신은 이미 세 명의 파이오니아를 지원하고 있다고 대답했죠. 그래서 나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형제보다 더 잘 지원하실 수 있지 않을까요?” 하고 질문했습니다. 그리고 가족과 함께 즐겁게 파이오니아 봉사를 해 보라고 권했죠. 그 결과 형제는 6개월 후에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아내와 나는 여호와의 “놀라운 일들”을 계속 ‘후대에 알릴’ 것이며 그들도 우리처럼 즐겁게 여호와를 섬기게 되기를 바랍니다.—시 71:17, 18.
a 오늘날의 생활과 봉사 집회 감독자.
b 「파수대」 2020년 2월호 26-30면에 실린 레옹스 크레포의 체험기를 참조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