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 후서 2:1-26

2  그러므로 내 아들이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과분한 친절로 계속 능력을 얻으십시오. 2  그리고 그대가 나에게서 들었고 많은 증인이 확증한 것들을+ 충실한 사람들에게 맡기십시오. 그러면 그들도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적합한 자격을 갖추게 될 것입니다. 3  그리스도 예수의 훌륭한 군인으로서+ 고난에 참여하십시오.+ 4  군인으로 복무하는 사람은 자기를 군인으로 모집한 사람의 승인을 얻기 위해 생계를 위한 영리 활동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5  또한 경기에 참가하는 사람은 규칙에 따라 경기를 하지 않으면 면류관을 받지 못합니다.+ 6  열심히 일하는 농부가 소출을 먼저 받아야 합니다. 7  내가 하는 말을 계속 생각하십시오. 주께서 모든 일에 그대에게 이해력을 주실 것입니다. 8  내가 전파하는 좋은 소식과 일치하게,+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일으켜지셨고+ 다윗의 자손이셨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9  그 좋은 소식을 위해 나는 고난을 겪고 있으며 죄인처럼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의 말씀은 갇혀 있지 않습니다.+ 10  이 때문에 나는 선택된 자들을 위해 모든 것을 계속 인내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구원을 받고 영원한 영광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11  이 말은 믿을 만합니다. 곧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는다면, 또한 확실히 그분과 함께 살 것입니다.+ 12  우리가 계속 인내한다면, 또한 왕으로서 그분과 함께 통치할 것입니다.+ 우리가 부인한다면, 그분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입니다.+ 13  우리가 불충실해도 그분은 계속 충실하십니다. 그분은 자신을 부인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14  그들에게 이것을 계속 생각나게 하고, 말 때문에 싸우지 말라고 하느님 앞에서 그들에게 지시하십시오. 그런 일은 아무 쓸모가 없고 듣는 사람들에게 해를 입힐 뿐입니다. 15  그대 자신을 승인받은 사람으로,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다루며+ 아무것도 부끄러워할 것이 없는 일꾼으로 하느님께 바치기 위해 최선을 다하십시오. 16  거룩한 것에 어긋나는 헛된 말을 배척하십시오.+ 그것은* 사람을 더욱더 불경건에 빠지게 만들고, 17  그들의 말은 괴저처럼 퍼질 것입니다. 그들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습니다.+ 18  그들은 진리에서 벗어나 부활이 이미 일어났다고 말하면서+ 일부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19  그렇지만 하느님의 견고한 기초는 그대로 서 있으며, 거기에는 “여호와께서는 자신에게 속한 사람들을 아신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나 불의를 버려야 한다”라는 인장이 찍혀 있습니다. 20  큰 집에는 금이나 은으로 만든 그릇뿐만 아니라 나무나 진흙으로 만든 그릇도 있어서, 어떤 것은 귀하게 쓰이고, 어떤 것은 귀하게 쓰이지 않습니다. 21  그러므로 누구든지 귀하게 쓰이지 않는 것들로부터 떠나 있으면,+ 귀하게 쓰이는 그릇 곧 거룩하게 되어 주인에게 유용하고 모든 선한 일을 위해 준비된 그릇이 될 것입니다. 22  젊음의 욕망을 피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주를 부르는 사람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평화를 추구하십시오.+ 23  또한 어리석고 무지한 논쟁을 배척하십시오.+ 알다시피 그런 논쟁은 싸움을 일으킵니다. 24  주의 종은 싸우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모든 사람을 부드럽게 대하고,+ 가르칠 자격을 갖추고, 해를 당할 때에도 참고,+ 25  그대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을 온화하게 교훈해야 합니다.+ 어쩌면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셔서 진리의 정확한 지식에 이르게 하실지도 모릅니다.+ 26  그리고 그들이 마귀에게 사로잡혀 그의 뜻을 행하고 있음을+ 알고 정신을 차려 그의 올무에서 벗어날지도 모릅니다.

각주

또는 “그들은”.

연구 노트

사랑하는 아들: 바울과 디모데 사이에는 매우 친밀하고 따뜻한 유대가 있었다. 사실 바울은 영적인 의미에서 디모데의 아버지와도 같은 사람이었다. (고전 4:17; 빌 2:22) 디모데 전서에서 바울은 디모데를 “진정한 아들”, “내 아들”이라고 불렀다. (딤전 1:2, 18) 바울이 디모데 후서를 쓴 때는 두 사람이 함께 봉사한 지 적어도 14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것을 알았던 바울은 이 편지가 자신이 디모데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딤후 4:6-8) 바울은 디모데를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부름으로 자신의 애정을 따뜻하게 표현한다.—딤전 1:2, 18 연구 노트 참조.

하느님의 은혜: 또는 “과분한 친절”. 그리스어 카리스는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 150회 이상 나오며, 문맥에 따라 다른 의미를 전달한다. 카리스가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베푸시는 과분한 친절을 가리킬 때는, 그분이 무엇인가를 돌려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고 주시는 관대한 선물을 뜻한다. 이 단어는 받을 만한 노력도 하지 않았고 받을 자격도 없는 대상에게 하느님께서 관대한 마음에서 우러나와 베푸시는 풍성한 선물, 관대한 사랑과 친절을 가리킨다. (롬 4:4; 11:6) 하지만 이 단어가 언제나, 친절을 받는 대상이 자격이 없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도 하느님으로부터 이 은혜 즉 친절을 받으실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와 관련된 문맥에서는 이 단어가 이 구절에서처럼 “하느님의 은혜”로 번역되거나 “호의”로 번역되었다. (눅 2:40, 52) 다른 문맥에서 이 그리스어 단어는 “은혜”, “호의”, “고마운 선물”로 번역되었다.—눅 1:30; 행 2:47; 7:46; 고전 16:3; 고후 8:19, 각주.

하느님의 은혜와 진리로 충만하셨다: “말씀” 즉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은혜를 받으셨으며 언제나 진실하셨다. 하지만 문맥을 볼 때 예수께서 “하느님의 은혜와 진리로 충만하셨다”는 표현에는 더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여호와께서 아들을 특별히 선택하여 아버지의 과분한 친절과 진리를 온전히 설명하고 보여 주게 하셨다는 것이다. (요 1:16, 17) 하느님의 과분한 친절과 진리가 예수를 통해 온전히 밝혀졌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었다.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도 본 것입니다.” (요 14:9)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과분한 친절과 진리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이려고 하는 모든 사람에게 그 친절과 진리가 전달되는 통로였다.

내 아들이여: 바울은 이 말을 사용해 애정을 표현한다.—딤후 1:2 연구 노트 참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과분한 친절로: 바울은 이 표현을 사용하여 디모데에게 “능력을 얻는” 것이 “과분한 친절”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을 보여 준다. (용어 설명 “과분한 친절” 참조) 여호와께서는 예수에게 특별한 친절 즉 은혜를 관대하게 베푸셨으며, 따라서 예수는 ‘하느님의 은혜로 충만한’ 분이라고 할 수 있다. (요 1:14연구 노트) 또한 예수께서는 그러한 친절에 대해 인식을 나타내는 사람들에게 그 친절을 베푸는 수단이 되셨다. 따라서 영감받은 성경은 하느님의 과분한 친절뿐만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과분한 친절”도 언급한다.—살전 5:28; 살후 3:18.

계속 능력을 얻으십시오: 바울은 디모데에게 무한한 능력의 근원이신 여호와 하느님께 의지하라고 권한다. 여기에 사용된 그리스어 동사 엔디나모오는 명사 디나미스(능력; 힘)와 어근이 같은 단어이다. 디나미스딤후 1:8에서 “하느님의 능력”이라는 표현 가운데 사용되었다. 한 참고 문헌에 따르면 여기서 바울이 사용한 동사의 형태는 “디모데가 하느님께 계속 의지해야 한다는 즉 ‘계속 힘을 얻어야’ 한다는 점을 보여 준다.” 바울은 엡 6:10에서도 동일한 동사를 사용하여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여호와 하느님] 안에서 그리고 그분의 강력한 힘 안에서 계속 능력을 얻으라”고 권했다.

그대에게 맡겨진 것을 지키고: 여기서 바울이 언급한 “맡겨진 것”에는 디모데에게 맡겨진 성경 진리가 포함된다. (살전 2:4; 딤후 1:14. 롬 3:2연구 노트 비교) “맡겨진 것”으로 번역된 단어는 은행에 보관된 귀중품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기도 했다. 또한 누군가에게 관리하도록 맡기는 물건을 가리키는 데도 쓰였는데, 그리스어 「칠십인역」에서 그러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레 6:2, 4 [5:21, 23, LXX]) 디모데는 신성한 소식을 다른 사람들이 접할 수 없게 숨겨 두는 것이 아니라, 가르치는 일을 할 때 그 소식을 주의 깊이 정확하게 전달한다는 의미에서 그것을 지켜야 했다. (딤후 2:2) 그렇게 한다면 “헛된 말과 거짓된 ‘지식’”을 가르치는 사람들에 의해 귀중한 진리가 변질되거나 더럽혀지지 않도록 지킬 즉 보호할 수 있을 것이었다.

우리가 적합한 자격을 갖추는 일은 하느님에게서 나옵니다: 이 구절에서 “적합한 자격이 있다”, “적합한 자격을 갖추다”로 번역된 그리스어 단어들은 기본적으로 “충분한; 알맞은”을 의미한다. 이 단어들이 사람과 관련하여 사용되면 “능숙한; 유능한; 합당한”을 의미할 수 있다. (눅 22:38; 행 17:9; 고후 2:16; 3:6) “우리가 적합한 자격을 갖추는 일은 하느님에게서 나옵니다”라는 표현은 다음과 같이 번역할 수도 있다. “우리가 이 일을 할 수 있게 해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칠십인역」출 4:10에 이 그리스어 중 하나가 사용되었는데, 그 구절에는 모세가 자신이 파라오 앞에 나아갈 자격이 없다고 말하는 내용이 나온다. 히브리어 본문에 따르면 모세는 “저는 말을 잘하는 사람[직역하면 “말의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칠십인역」에서는 그 표현을 “저는 자격이 없습니다”라고 번역한다.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모세가 그 임무를 수행할 자격을 갖추게 해 주셨다. (출 4:11, 12) 그와 비슷하게 그리스도인 봉사자들도 “살아 계신 하느님의 영”에 의해 자격을 갖추게 된다.—고후 3:3.

확증한 것들을 충실한 사람들에게 맡기십시오: 바울은 디모데가 자신이 배운 귀중한 진리를 다른 책임 맡은 사람들에게 전달하기를 즉 맡기기를 바란다. “맡기다”로 번역된 단어의 의미를 볼 때 디모데는 그 일을 주의를 기울여 해야 했다. (딤전 6:20 연구 노트 참조) 바울의 이 말은 모든 제자들이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을 해야 한다는 예수의 명령과 조화를 이룬다. (마 28:19, 20) 바울은 다음과 같은 과정을 요약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바울을 가르치셨고 바울은 디모데를 가르쳤다. 그리고 디모데는 그 가르침을 충실한 사람들에게 맡겼고 그들도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가르칠 적합한 자격을 갖추게 될 것입니다: “적합한 자격을 갖추다”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어떤 일을 할 수 있을 만큼 “유능하다” 또는 어떤 일을 하기에 “충분하다”를 의미할 수 있다.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에게 쓴 편지에서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여, 그리스도인들이 맡겨진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그들을 유능하게 해 주신다는 점을 설명한다.—고후 3:5 연구 노트 참조.

그리스도 예수의 훌륭한 군인: 딤후 2:3-6에서 바울은 디모데가 다른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마찬가지로 어려움과 고난을 인내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점을 설명하기 위해 세 가지 예를 든다. 3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을 군인에 비하는데, 그는 자신이 쓴 편지들에서 여러 번 그 비유를 사용했다. (고전 9:7; 고후 10:3-5; 엡 6:10-17; 빌 2:25; 살전 5:8; 딤전 1:18; 몬 2) 군인은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며 어려움을 겪을 각오가 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도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에 순종하며 기꺼이 고난을 감수한다. 그러한 고난에는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심지어 박해를 받는 것이 포함된다. 따라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훌륭한 군인”으로서 굳은 의지, 인내, 자기 징계와 같은 특성들이 필요하다는 점을 일깨워 준 것이다.

생계를 위한 영리 활동에 얽매이지: 복무 중인 훌륭한 군인은 민간인들이 하는 활동이나 돈을 버는 활동에 “얽매이지”(또는 “참여하지”) 않는다. “생계를 위한 영리 활동”(달리 번역하면 “일상사”)을 하다 보면 주의가 산만해져 군인으로서 해야 할 일에 정신과 활력을 쏟지 못하게 될 수 있다. 군인이 하는 일에 그 자신의 생명과 다른 사람들의 생명이 달려 있으므로, 그는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행동할 준비가 늘 되어 있어야 한다. 그와 비슷하게 디모데도 다른 일들에 주의를 빼앗기지 않고 봉사의 직무에 계속 전념해야 했다.—마 6:24; 요1 2:15-17.

경주할 때 주자들이: 운동 경기는 그리스 문화의 중요한 부분이었으므로 바울은 그러한 경기들을 자주 비유로 사용했다. (고전 9:24-27; 빌 3:14; 딤후 2:5; 4:7, 8; 히 12:1, 2)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은 고린도 근처에서 열리던 이스트미아 경기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이스트미아 경기는 2년에 한 번씩 열렸다. 바울은 기원 51년에 이스트미아 경기가 열렸을 때 고린도에 있었을 것이다. 이스트미아 경기는 그리스 올림피아에서 열리는 올림픽 경기 다음으로 중요한 경기였다. 그와 같은 그리스의 경기들에서는 다양한 길이의 달리기 경주가 열렸다. 바울은 달리기 선수와 권투 선수의 비유를 들어, 자제를 나타내고 효율적으로 일하고 인내해야 할 필요성을 가르쳤다.—고전 9:26.

경주: “경주”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스타디온은 스타디움을 가리킨다. 이 단어는 달리기나 그 밖의 경기가 열리던 경기장을 가리킬 수도 있고 달리기 경주 자체를 가리킬 수도 있으며 특정한 길이를 가리킬 수도 있다. 바울은 여기서 달리기 경주를 가리켜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이다. 그리스어 스타디온이 길이 단위로 사용될 경우, 1스타디온의 길이는 지역마다 달랐다. 고린도에서는 1스타디온이 약 165미터였다. 1로마스타디온은 약 185미터였다.—부록 나14 참조.

경기에 참가하는 사람: 또는 “운동선수”. 여기 사용된 그리스어 동사 아고니조마이는 명사 아곤과 어근이 같은데, 아곤은 운동 경기를 가리키는 데 자주 사용된다. 히 12:1에서 이 명사는 생명을 위한 그리스도인의 “경주”를 가리키는 비유적인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좀 더 넓은 의미로 사용되어 “싸움”(빌 1:30; 딤전 6:12; 딤후 4:7)이나 “고투”(골 2:1)를 가리키기도 한다. 이 구절(고전 9:25)에 사용된 그리스어 동사의 변화형은 “기운을 다해 힘쓰다”(눅 13:24), “열심히 노력하다”(골 1:29), “힘쓰다”(골 4:12; 딤전 4:10), “싸우다”(딤전 6:12)로 번역된다.—눅 13:24 연구 노트 참조.

자제를 나타냅니다: 시합을 준비하는 운동선수는 자제를 나타냈다. 많은 경우 식단을 제한했으며 술을 마시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역사가 파우사니아스에 따르면, 선수들은 올림픽 경기를 위해 열 달 동안 훈련을 했다고 한다. 다른 주요 경기들의 경우에도 훈련 기간이 그와 비슷했던 것 같다.

자기를 훈련하십시오: 7절부터 10절에서 바울은 운동 경기와 관련이 있는 몇 가지 표현을 사용한다. (딤전 4:8, 10 연구 노트 참조) 여기서 “자기를 훈련하십시오”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김나조이다. 이 단어는 운동선수들이 다양한 경기나 시합에 나가기 위해 받는 고된 훈련을 묘사하는 데 자주 사용되었다. 그러한 훈련을 받으려면 고도의 자기 징계, 각고의 노력, 굳은 의지가 있어야 했다. (고전 9:25 연구 노트 참조) 바울은 이 표현을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함으로, 경건한 정성이라는 특성을 기르려면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지 강조한다.

훈련: 또는 “운동”. 바울은 앞 구절에서 운동 경기와 관련 있는 표현을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했다. 그 구절에서 그가 사용한 그리스어 동사 김나조는 문자적으로 “(운동선수처럼) 훈련하다”를 의미한다. (딤전 4:7 연구 노트 참조) 그는 이 구절에서도 운동 경기와 관련 있는 단어인 명사 김나시아를 사용하는데, 그 단어는 몸을 훈련하는 것을 가리킨다. 바울 시대에 운동선수들이 훈련을 하는 곳은 라틴어로 김나시움(그리스어로는 김나시온)이라고 불렸다. 그러한 곳은 로마 제국의 여러 도시에서 사회생활이 이루어지는 중요한 장소였기 때문에 잘 알려져 있었다. 그 문화권에서 일부 사람들은 몸을 훈련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하지만 그런 훈련을 부적절하거나 불필요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바울은 영감을 받아 균형 잡힌 견해를 알려 준다. 그는 육체의 훈련도 조금은 유익하다고 즉 일시적으로 어느 정도 가치가 있다고 인정한다. 하지만 “경건한 정성을 목표로 삼아” 훈련하는 것이 훨씬 더 유익하다는 점을 강조한다.—딤전 4:7.

경기에: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운동 경기에 비한다. 선수들은 규칙에 따라 경기를 해야 했다. 경기 장소에는 경기 규칙을 새긴 비문이 세워져 있었다. 뇌물이 금지되어 있었고 심판이 규칙을 엄격하게 시행했다. 훈련 중이나 경기 중에 하나 이상의 규칙을 어기면 선수 자격을 박탈당했다. 그와 비슷하게 그리스도인들도 하느님의 승인을 받으려면 삶에 대한 그분의 표준과 요구 조건을 따라야 한다. 디모데는 “고난”에 참여해야 했으며 고통을 줄이려고 하느님의 요구 조건 중 어느 것도 어겨서는 안 되었다.—딤후 2:3. 고전 9:24, 25; 딤전 4:7, 8 연구 노트 참조. 또한 미디어 갤러리 “썩어 없어질 면류관” 참조.

열심히 일하며 힘쓰고 있습니다: 바울은 의미가 비슷한 두 개의 그리스어 단어를 함께 사용하여, 말하고자 하는 점을 한층 더 강조한다. (골 1:29 비교) 먼저 나오는 “열심히 일하다”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지치거나 기진맥진할 만큼 일하는 것을 가리킬 수 있다. (눅 5:5; 딤후 2:6) 다음으로 나오는 “힘쓰고 있다”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노력을 기울이는 정도에 더 초점을 맞춘 것으로, 고투하고 노력을 쏟아붓는 것을 가리킬 수 있다.—눅 13:24 연구 노트 참조.

열심히 일하는 농부: 여기서 “열심히 일하다”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수고하다; 애쓰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기진맥진할 정도로 일하는 것을 가리킬 수 있다. 농부가 풍성한 수확을 거두기를 바란다면 지칠 줄 모르고 일해야 했으며, 때로는 매우 힘든 상황에서도 그렇게 해야 했다. 마찬가지로 디모데도 하느님의 승인을 얻기 원한다면 몸을 사리지 않고 부지런히 일해야 했다.—고전 3:6, 7; 골 1:28, 29. 딤전 4:10 연구 노트 비교.

숙고하고: 또는 “묵상하고”. 여기서 바울은 묵상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러한 것들은 앞 구절들에서 바울이 디모데에게 행실, 봉사의 직무, 가르치는 일에 관해 베푼 교훈을 가리킬 수도 있고 (딤전 4:12-14) 이 편지 전체를 가리킬 수도 있다. 히브리어 성경에서도 여호와의 종들이 자신의 행동 그리고 자신과 하느님과의 관계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시 1:2 및 각주; 63:6; 77:12; 143:5) 예를 들어 수 1:8에서 여호와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율법책”을 “밤낮으로 낮은 소리로 읽으라[또는 “묵상하라”, 각주]”고 말씀하신다. 그 구절에 사용된 히브리어 동사는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속도로 읽는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리스어 「칠십인역」은 그 구절에서 바울이 이 구절 즉 딤전 4:15에서 사용한 것과 같은 동사를 사용한다. 여호수아처럼 디모데도 영적으로 계속 발전하고 자신의 임무를 더 잘 수행하기 위해 매일 성경을 묵상해야 했다.

내가 하는 말을 계속 생각하십시오: “계속 생각하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분별력을 사용하다”로 번역할 수도 있다. (마 24:15; 막 13:14) 앞서 바울은 세 가지 예를 들었다. (딤후 2:3-6) 이제 그는 디모데에게 그 예들에 담긴 교훈을 생활에 적용하기 위해 깊이 생각해 보라고 권한다. (딤전 4:15 연구 노트 비교) 바울은 디모데에게 여호와께서 그에게 필요한 이해력 또는 분별력을 주실 것이라고 확신시킨다. 바울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는 비슷한 조언이 나오는 잠 2:6의 내용을 간접적으로 언급한 것일 수 있다.

다윗의 자손: 또는 “다윗의 후손”. 직역하면 “다윗의 씨”.—부록 가2 참조.

하느님의 말씀은 갇혀 있지 않습니다: 바울은 이 구절의 앞부분에서 자신이 “죄인” 취급을 당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가 사용한 단어는 예수 곁에서 처형된 죄수를 가리키는 데 사용된 단어와 동일하다. (눅 23:32, 33, 39) 하지만 이제 바울은 대조가 되는 생생한 표현을 사용하여, 자신은 갇혀 있지만 어떤 감옥이나 쇠사슬도 하느님의 말씀을 가둘 수는 없다고 말한다. (딤후 1:8, 16) 한 참고 문헌에 따르면 바울은 좋은 소식의 반대자들이 “그 소식을 전하는 사람은 막을 수 있을지 몰라도 그 소식을 막을 수는 없다”고 말한 것이다.

끝: 마 24:6, 14 연구 노트 참조.

인내하는: “인내하다”로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히포메노)는 문자적으로 “아래에 머물러(남아) 있다”를 의미한다. 이 말은 흔히 “도망가지 않고 남아 있다; 자신의 입장을 고수하다; 견뎌 내다; 굳건하게 그대로 있다”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마 10:22; 롬 12:12; 히 10:32; 약 5:11) 이 문맥에서는 반대와 시련을 겪으면서도 계속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는 것을 가리킨다.—마 24:9-12.

위로 부르시는 상: 바울은 다른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에게도 메시아 왕국의 일원으로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할 희망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딤후 2:12; 계 20:6) “위로 부르시는” 것은 하늘 왕국의 일원이 되라는 초대인 셈이다. 하지만 “하늘의 부르심[또는 “초대”, 각주]에 참여하는 자들”은 (히 3:1, 2) 그 부르심에 “충실함”을 증명함으로 (계 17:14) “부르심과 선택을 확실히” 해야 한다. (벧후 1:10) 그렇게 해야만 그 초대에 따르는 “상”을 받을 수 있다.—빌 3:20 연구 노트 참조.

우리가 계속 인내한다면: 이 표현은 예수의 이러한 약속을 떠올리게 한다. “끝까지 인내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마 24:13 연구 노트 참조) 바울과 그의 가까운 동료 디모데에게는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할 영광스러운 희망이 있었다. (눅 22:28-30) 여기서 바울은 그 희망이 이루어지려면 인내가 꼭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는 자신이 영으로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희망이 당연히 이루어질 것이라고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빌 3:14 연구 노트 참조) 그는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 중 일부가 믿음을 저버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빌 3:18) 하지만 바울은 자신이 죽기까지 충실을 유지할 것이라고 확신했다.—딤후 4:6-8.

하느님은 참되시다는 것이 드러날 것입니다: 바울은 앞 구절에서 “그들이 믿음이 없다고 해서 하느님의 충실성이 무효가 되겠습니까?”라고 질문한 뒤, 이 구절의 처음 부분에서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말한다.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믿음이 없다는 것을 드러냈는데, 특히 예수가 메시아라는 것을 알려 주는 히브리어 성경의 예언들을 배척함으로 그렇게 했다. (롬 3:21) 그들은 하느님의 “신성한 선언”을 맡은 사람들이었는데도 (롬 3:2) 그러한 입장을 취함으로 여호와께서 자신의 약속에 대해 참되시지 않은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그러한 선언들을 충실하게 이행하셨다. 바울은 하느님께서 신뢰할 만한 분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다윗왕이 한 말의 「칠십인역」 표현을 다음과 같이 인용했다. “당신[하느님]의 말씀으로 당신의 의로움이 증명될 것입니다.” (시 51:4[50:6, LXX]) 그 구절에서 다윗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면서 하느님께서 참되고 의로운 분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을 정당화하거나 하느님이 신뢰할 만한 분이라는 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바울은 누가 그 점을 부정하든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 점을 부정하든, 하느님께서 언제나 충성스럽고 참된 분이라는 점을 설명하기 위해 다윗의 말을 인용했다.

그분은 자신을 부인하실 수 없기: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본성과 특성과 표준에 어긋나는 방식으로 행동하실 수 없다. (출 34:6, 7; 말 3:6; 딛 1:2; 약 1:17) 또한 자신의 목적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실 수도 없다. 따라서 다른 이들이 어떻게 행동하든 여호와께서는 항상 자신의 말씀을 이루신다.—롬 3:3, 4연구 노트.

말에 대한 토론: 직역하면 “말싸움”. ‘논쟁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은 흔히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교리를 퍼뜨리기 위해 사소한 문제에 대해서도 토론을 벌인다. 그러한 토론은 ‘시기와 분쟁을 일으키며’ 심지어 중상(그리스어 블라스페미아) 즉 다른 사람의 명예를 훼손시키는 모욕적인 말로 이어질 수 있다.—골 3:8 연구 노트 참조.

엄숙히 명령합니다: 무게감이 느껴지는 이 표현은 하나의 그리스어 동사를 번역한 것이다. 한 사전에서는 이 동사를 “매우 중요한 문제에 대해 권위를 갖고 권고하다”라고 정의한다. (동일한 동사가 「칠십인역」에도 나오는데, 예를 들면 삼상 8:9과 대하 24:19에 사용되었다.) 앞서 바울은 장로가 잘못을 범했다는 고발을 당할 경우 그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죄를 거듭 짓는 사람들을 책망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한 문제들이 매우 심각한 것이기 때문에 바울은 디모데에게 하느님과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명령한다고 말한다. 임명받은 남자들이 그런 문제들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일까지도 가장 높은 권위를 가지신 분들이 분명히 보고 계신다는 것을 일깨워 줌으로 경각심을 갖게 한 것이다.—롬 2:16; 히 4:13.

말 때문에 싸우지 말라고: 바울은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말에 대해 싸우지 말라고 권고한다. 일부 거짓 선생들이 그러한 일을 부추겼던 것 같다. “말 때문에 싸우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말”을 의미하는 명사와 “싸우다”를 의미하는 동사가 합쳐진 것이다. 이 표현은 바울의 편지들보다 이전에 기록된 고대 문헌에는 나오지 않는다. 바울은 디모데 전서에서 이 단어와 어근이 같은 명사를 사용했는데, 그 단어를 직역하면 “말싸움”이 된다. (딤전 6:4 연구 노트 참조) 그러한 싸움은 말의 의미에 대한 사소한 의견 차이 때문에 벌어졌을 수 있다. 하지만 그로 인해 해롭고 매우 심각한 결과가 초래될 수 있었다.

하느님: 일부 권위 있는 그리스어 사본들에는 이 부분이 “하느님”으로 되어 있고, 몇몇 사본들에는 “주”라고 되어 있다.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을 히브리어나 그 밖의 언어들로 옮긴 몇몇 번역판은 이 부분에 하느님의 이름을 사용한다.—부록 다1 참조.

지시하십시오: 또는 “엄숙히 명령하십시오”. 여기서 바울이 사용한 그리스어를 더 직역에 가깝게 번역하면 “철저히 증거하십시오”가 된다. (행 20:24; 28:23) 이 단어에 대해 한 참고 문헌에서는 이렇게 알려 준다. “이 단어는 중요한 문제와 매우 위험한 상황에 대해 ‘증언하다, 경고하다’를 의미한다.”

듣는 사람들에게 해를 입힐: 이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표현은 카타스트로페(“파멸”이라는 의미)라는 단어를 포함하고 있으며, “듣는 사람들을 파멸시킬”로 번역할 수도 있다. 바울은 말 때문에 싸우는 것에 대해 경고하기 위해 강한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또한 그는 디모데에게 “하느님 앞에서”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무의미한 다툼에 참여하지 말라고 지시하라고 말한다.—딤전 5:21 연구 노트 참조.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다루며: 바울이 여기서 사용한 그리스어 동사는 문자적으로 “똑바로 자르다”를 의미한다. 바울이 무엇을 염두에 두고 이 표현을 사용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다. 예를 들면, 그는 천막 만드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천을 똑바로 정확하게 자르는 것을 생각하면서 이 표현을 썼을 수 있다. 또는 「칠십인역」의 잠 3:6; 11:5에 나오는 이 단어를 간접적으로 언급한 것일 수 있다. 「칠십인역」의 그 구절들에서 이 동사는 사람이 가는 비유적인 길을 곧게 만드는 것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 동사는 농부가 고랑을 똑바로 내는 것과 같은 동작을 묘사하는 데도 사용되었다. 바울이 무엇을 염두에 두었든, 그가 디모데에게 한 말의 취지는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칠 때 올바른 길에 고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디모데는 그 말씀을 올바로 다루고 정확하게 설명해야 했으며, 개인적인 견해나 말이나 그 밖의 사소한 문제에 대한 논쟁에 빠짐으로 그 길에서 벗어나서는 안 되었다.—딤후 2:14, 16.

최선을 다하십시오: 한 사전에서는 바울이 여기서 사용한 그리스어(스푸다조)를 “열심을 보이다, 애쓰다, 온갖 노력을 기울이다, 성실하게 일하다”로 정의한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러한 태도를 나타내라고 권고한 것이다. 디모데가 그렇게 한다면 하느님의 승인을 받고 훌륭한 일꾼이 될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디모데의 노력을 알아주지 않거나 그를 반대한다 해도 그는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을 것이었다.

헛된 말: 직역하면 “헛된 소리”. 여기서 바울이 사용한 그리스어 표현은 “가치 없는 이야기”를 의미한다. 일부 성경 번역판에서는 이 표현을 “헛된 잡담”, “무의미한 논쟁”으로 번역한다. 그러한 말은 하느님의 말씀에 나오는 확실한 진리가 아니라 추측에 근거해 있었다. 그것은 믿음을 키우는 데 있어서 아무 가치가 없다는 의미에서 헛된 것이었다. (딤전 1:6; 딤후 4:4; 딛 3:9) 더 심각한 문제로, 많은 경우 그러한 잡담이나 논쟁은 거룩한 것에 어긋나는 것 즉 속되거나 불경스러운 것이었다. 그러한 논쟁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말씀에 담긴 진리를 제쳐 두고 사람의 생각을 앞세우는 것이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런 말을 멀리하라고 경고했다.—딤전 4:7연구 노트; 딤후 2:16.

불경건: 또는 “불경”. 성경에서 그리스어 아세베이아와 그와 어근이 같은 다른 표현들은 하느님에 대한 숭상심이 없거나 그분에게 도전하기까지 하는 것을 가리킨다. (유 14, 15) 아세베이아의 반대말인 유세베이아는 “경건한 정성; 경건함”으로 번역된다. 그러한 숭상심은 하느님을 위해 봉사하고 그분께 정성을 바치고 그분을 숭배하는 것으로 나타난다.—행 3:12; 딤전 2:2; 4:7, 8; 딤후 3:5, 12.

헛된 말: 딤전 6:20 연구 노트 참조.

불경건: 롬 1:18 연구 노트 참조.

논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사로잡혀 있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동사는 문자적으로 “병들어 있다”를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표현은 “논쟁…에 불건전한 열정을 쏟습니다”로 번역할 수도 있다. 이것은 바울이 앞서 언급한,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건전한 교훈”과 대비되는 표현이다.—딤전 6:3 연구 노트 참조.

부활이 이미 일어났다고 말하면서: 후메내오와 빌레도 같은 에베소의 일부 거짓 선생들은 헌신한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비유적인 의미로 부활되었다고 가르친 것 같다. 몇몇 거짓 선생들은 심지어 바울의 말을 왜곡해서 자신들의 잘못된 견해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사용했을 수 있다. 바울은 죄인이 침례를 받을 때 이전의 생활 방식에 대해 죽고 비유적인 의미로 살아나게 된다고 가르쳤다. 하지만 그러한 상징적인 부활은 성경에서 알려 주는 문자적인 부활의 희망과는 별개의 것이었다. 부활이 “이미 일어났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은 미래에 있을 문자적인 부활의 희망을 부인하는 것이었으며 배교자들이었다.—롬 6:2-4, 11; 엡 5:14. 엡 2:1 연구 노트 참조.

나는 그들을 사탄에게 넘겨주어: 이 표현은 그들을 회중에서 추방하는 즉 제명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러한 조처가 필요했던 이유는 바울이 언급한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고 고의적으로 계속 죄를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고전 5:5 연구 노트 참조.

징계를 통해 가르침받게 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죄를 저지르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을 “사탄에게 넘겨주는” 즉 회중에서 추방하는 한 가지 목적이 무엇인지 밝힌다. (이 구절에 나오는 나는 그들을 사탄에게 넘겨주어에 대한 연구 노트 참조) 이 구절에 언급된 두 사람은 믿음의 파선을 겪었으며 “신성을 모독하지” 않아야 한다는 교훈을 배우도록 제명되어야 했다. (딤전 1:19 연구 노트 참조) 바울은 그들이 처벌을 받게 하는 것뿐만 아니라 교훈을 얻게 하는 것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한 참고 문헌에서 알려 주듯이, “그들이 교훈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은 남아 있었다.”

괴저: 여기에 사용된 그리스어 강그라이나는 의학 용어로, 신체 조직의 일부가 혈액 순환 장애로 죽는 현상을 가리킨다. 이 병은 흔히 빠른 속도로 퍼지며 치료하지 않고 내버려 둘 경우 생명이 위험해질 수 있다. 바울은 배교적인 가르침과 “거룩한 것에 어긋나는 헛된 말”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 표현을 비유적으로 사용한다. (딤후 2:16-18) 그는 영적으로 불건전한 그러한 가르침을, 하느님의 말씀에 나오는 진리에 근거한 “건전한” 가르침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자주 언급한다. (딤전 1:10; 6:3; 딤후 1:13; 딛 1:9; 2:1. 또한 딤전 6:4 연구 노트 참조) 바울은 “괴저처럼 퍼지다”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 헛된 말과 거짓 가르침이 회중 내에서 신속히 퍼질 수 있으며 영적인 죽음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고전 12:12-27.

그들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배교적인 가르침을 배척하라고 말하면서 배교자들 가운데 이 두 사람을 언급한다. 후메내오와 빌레도는 진리에서 벗어났으며, 부활이 이미 일어났다고 주장하면서 거짓을 가르침으로 다른 사람들의 믿음에 해를 끼치고 있었다. (딤후 2:18 연구 노트 참조) 바울이 디모데 전서를 쓸 당시, 후메내오는 이미 믿음을 배척한 상태였다. 그는 제명되어 회중에서 추방되었던 것 같다. 그것은 그가 “신성을 모독하지 못하도록 징계를 통해 가르침받게” 하려는 것이었다. (딤전 1:20 연구 노트 참조) 그 후로 1년 이상이 지났지만 그는 변화하지 않았다.

범죄와 죄 가운데 죽어 있었지만: 성경에서는 생명과 죽음이 비유적인 즉 영적인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바울은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이 과거에 그들의 생활 방식 때문에 “범죄와 죄 가운데 죽어 있었다”고 말한다. 한 사전에서는 이 구절에 나오는 “죽어 있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가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된 것으로, “죽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도덕적으로 혹은 영적으로 몹시 결핍되어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바울은 이제 여호와께서 영으로 기름부음받은 그 그리스도인들을 살아 있는 것으로 보신다고 말한다. 그들이 예수의 희생을 근거로 죄 많은 생활 방식을 회개했기 때문이다.—엡 2:5; 골 2:13. 눅 9:60; 요 5:24, 25 연구 노트 참조.

좋은 소식을 여러분이 굳게 잡고 있다면: 그리스도교의 “초보적인 교리” 중 하나인 부활 교리가 고린도에서 공격을 받고 있었다. (히 6:1, 2) 일부 사람들은 “죽은 사람의 부활이 없다”고 주장했다. (고전 15:12) 바울은 “내일이면 죽을 테니 먹고 마십시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을 언급한다. (고전 15:32) 그는 사 22:13을 인용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그가 한 말은 사후 생명을 부정한 에피쿠로스 같은 그리스 철학자들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의 생각을 잘 보여 준다. (행 17:32. 고전 15:32 연구 노트 참조) 또는 회중 내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부활을 부정하는 사두개인들의 견해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있었을 수 있다. (막 12:18) 또 다른 가능성으로,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일종의 영적 부활을 이미 경험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수도 있다. (딤후 2:16-18)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이 ‘좋은 소식을 굳게 잡지’ 않는다면 그들은 헛되이 믿는 사람들이 되어 그들의 희망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지 못하게 될 것이었다.—고전 15:12 연구 노트 참조.

부활이 이미 일어났다고 말하면서: 후메내오와 빌레도 같은 에베소의 일부 거짓 선생들은 헌신한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비유적인 의미로 부활되었다고 가르친 것 같다. 몇몇 거짓 선생들은 심지어 바울의 말을 왜곡해서 자신들의 잘못된 견해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사용했을 수 있다. 바울은 죄인이 침례를 받을 때 이전의 생활 방식에 대해 죽고 비유적인 의미로 살아나게 된다고 가르쳤다. 하지만 그러한 상징적인 부활은 성경에서 알려 주는 문자적인 부활의 희망과는 별개의 것이었다. 부활이 “이미 일어났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은 미래에 있을 문자적인 부활의 희망을 부인하는 것이었으며 배교자들이었다.—롬 6:2-4, 11; 엡 5:14. 엡 2:1 연구 노트 참조.

믿음을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약 10년 전에 바울은 이미 부활의 희망을 약화시키는 거짓 가르침에 맞서 싸웠다. (고전 15:2연구 노트, 12. 행 17:32 비교) 미래에 하늘에서든 땅에서든 완전한 생명으로 부활되는 일이 있을 것이라는 점을 부정한 사람들은 영감받은 성경과 정면으로 반대되는 주장을 하는 것이었다. (단 12:13; 눅 23:43; 고전 15:16-20, 42-44) 그리스도인이 부활에 대한 잘못된 견해로 인해 믿음이 무너진다면, 그 약속된 미래의 상을 받을 희망을 잃게 될 것이었다.—요 5:28, 29.

진리의 기둥과 버팀대: 바울은 그리스도인 회중을 묘사하기 위해 두 가지 건축 용어를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한다. 바울 시대에 많은 큰 건물에는 튼튼한 기둥들이 있었는데, 주로 무거운 지붕을 떠받치는 역할을 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있던 성전이나 당시 디모데가 머물고 있던 에베소의 웅장한 건물들을 염두에 두었을 수 있다. (바울은 갈 2:9에서도 “기둥”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연구 노트 참조) 이 구절 즉 딤전 3:15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 회중 전체를 진리를 떠받치는 비유적인 기둥으로 묘사한다. “버팀대”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어떤 것의 견고한 기초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기초”, “지지대”, “방어벽”으로 번역할 수도 있다. 바울은 “기둥”과 “버팀대”에 해당하는 단어를 함께 사용함으로 회중이 하느님의 말씀의 신성한 진리를 옹호하고 지지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특히 회중에서 감독하는 책임을 맡은 사람들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다루”어야 했다. (딤후 2:15) 바울은 이 문제를 시급한 것으로 여겨, 대배교가 일어나기 전에 디모데가 회중을 강화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기를 바랐다.

여러분은 하느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갈라디아의 그리스도인들 중 많은 사람들은 바울의 전파 활동을 통해 “하느님을 알게 되었다.” 이 구절에 2번 나오는 “알게 되다”로 번역된 동사는 한 대상과 그가 아는 대상이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을 수 있다. (고전 8:3; 딤후 2:19) 따라서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그분에 대해 기본적인 사실을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의미한다. 거기에는 그분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어 나가는 것이 포함된다.—요 17:3 연구 노트 참조.

아니,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알게 되셨습니다: 바울이 사용한 이 표현은 어떤 사람이 “하느님을 알게 되”려면 하느님께서도 그를 아셔야 즉 승인하셔야 한다는 점을 보여 준다. 한 사전은 “알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를 “누군가의 신분이나 가치를 인정하면서 개인적인 관계를 맺다”로 정의한다. 그처럼 하느님에게서 호의적으로 인정을 받으려면 그분의 성품과 그분이 일을 처리하시는 방식과 피조물을 대하시는 방식과 일치하게 행동해야 한다.

인장: 성경 시대에 인장은 어떤 사실이나 소유권이나 합의를 확증하기 위한 서명으로 사용되었다. 하느님께서는 영으로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을 통해 비유적인 인장을 찍으셨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자신의 소유이며 하늘 생명을 받게 될 것이라는 점을 확증하셨다.—엡 1:13, 14.

인장이 찍혔습니다: 성경 시대에 인장은 어떤 사실이나 소유권이나 합의를 확증하기 위한 서명으로 사용되었다. 하느님께서는 영으로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으로 비유적인 인장을 찍으신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자신의 소유이며 하늘 생명을 받게 될 것이라는 점을 확증하신다.—고후 1:22 연구 노트 참조.

하느님의 견고한 기초: 바울은 이 “견고한 기초”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구체적으로 알려 주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다른 편지들에서 안정적이고 신뢰할 만하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기초”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예를 들어 그는 예수께서 여호와의 목적 안에서 하시는 역할을 기초에 비한다. (고전 3:11) 엡 2:20에서 그는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를 언급한다. 또한 그리스도인 회중을 묘사할 때에도 비슷한 표현들을 사용한다. (딤전 3:15 연구 노트 참조. 또한 히 6:1 참조) 앞선 두 구절(딤후 2:17, 18)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배교적인 가르침을 배척하라고 권고했다. 바울은 여호와의 방식과 활동과 특성이 항상 신뢰할 만하고 변함이 없다는 점을 확신시키기 위해 “하느님의 견고한 기초는 그대로 서 있다”는 표현을 사용한다.—시 33:11; 말 3:6; 약 1:17.

여호와: 여기서 바울은 민 16:5의 「칠십인역」 표현을 인용한 것이다. 「칠십인역」의 그 구절에서 모세는 고라와 그의 지지자들에게 여호와께서 “자신의 것인 사람들을 아신다”고 말했다. 그 구절의 히브리어 원문에는 네 개의 히브리어 자음으로 표기된 하느님의 이름(יהוה, 로마자로 음역하면 YHWH)이 나오며 따라서 「신세계역」에서는 이 구절 즉 딤후 2:19의 본문에 여호와라는 이름을 사용했다.—부록 다1다2 참조.

“여호와께서는 자신에게 속한 사람들을 아신다”: 바울이 민 16:5을 인용한 것을 볼 때, 그는 여호와께서 자신에게 반역하는 자들을 아신다는 점을 디모데에게 확신시켜 주기 위해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의 반역에 관한 기록을 언급한 것 같다. 그분은 반역자들의 악한 행동에 대해 조처를 취하실 수 있고 실제로 그렇게 하실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오래전에 고라와 그의 지지자들을 용납하지 않으신 것처럼, 1세기 배교자들로 인해 자신의 목적이 흔들리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실 것이었다. 하지만 모세가 말한 것처럼, 여호와께서는 자신에게 충실한 사람들을 아신다. 그분은 그들을 매우 잘 아시며 그들을 승인하신다는 것을 표현하신다.—갈 4:9 연구 노트 참조.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이 부분은 사 26:13의 「칠십인역」 표현을 간접적으로 인용한 것일 수 있다. 그 구절의 히브리어 원문에서는 하느님의 이름이 사용되었다.—부록 다3 소개; 딤후 2:19ㄴ 참조.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나 불의를 버려야 한다”: 바울이 사용한 표현을 볼 때 이 문구가 인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히브리어 성경에는 바울이 한 이 말과 정확히 일치하는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 바울이 바로 앞에서 언급한 문구는 고라의 반역에 관한 기록이 나오는 민수기 16장에서 인용한 것이다. 따라서 이 문구도 동일한 기록과 관련이 있고 민 16:26에 나오는 모세의 말에 담긴 사상을 언급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모세 시대에 여호와께 충성스러웠던 사람들은 단호한 행동을 취하여 불의한 사람들로부터 분리되어 있어야 했다. 마찬가지로 바울은 디모데와 그 밖의 충성스러운 그리스도인들에게 온갖 불의한 것을 버려야 한다고, 즉 온갖 불의한 것에서 떠나야 한다고 권고한다. 그러한 불의한 것에는 바울이 이 구절의 문맥에서 언급한 “말 때문에 싸우는” 일, “헛된 말”, 배교적인 가르침, “어리석고 무지한 논쟁”이 포함된다.—딤후 2:14, 16, 18, 23.

인장이 찍혀 있습니다: 인장은 소유권을 표시하거나 어떤 것이 사실임을 확증하려는 목적으로 찍은 인장이나 새긴 문구를 가리킬 수 있다. (용어 설명 “인장” 참조) 고대에는 건물의 기초나 다른 부분에 건축자나 소유주나 건물의 목적을 표시하는 문구를 새기는 일이 흔히 있었다. (고후 1:22; 엡 1:13 연구 노트 비교) 요한 계시록에서는 사도들의 이름이 새겨진 기초석들을 언급한다. (계 21:14) 앞의 연구 노트들에서 설명한 것처럼, 바울이 여기서 언급한 “인장”에는 두 가지 중요한 문구가 들어 있다.

그릇들: 바울은 이 구절에서도 계속 도공에 관한 예를 사용한다. (롬 9:21 연구 노트 참조) 그리스어 스케우오스는 원래 다양한 종류의 용기를 다 가리킬 수 있는 단어이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많은 경우 사람을 가리키는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행 9:15; 각주; 딤후 2:20, 21, 각주) 예를 들어 그리스도인을 영광스러운 보물 즉 봉사의 직무를 맡은 질그릇에 비한다. (고후 4:1, 7) 롬 9:21-23에 따르면, 하느님께서 악한 사람들 즉 진노의 그릇들을 즉각 멸망시키지 않으신 덕분에 합당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이 “자비의 그릇들”로 빚어질 시간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롬 9:23.

몸: 직역하면 “그릇”. 바울은 사람의 몸을 그릇에 비한다. ‘자신의 몸을 거룩함으로 다스리려면’ 생각과 욕망을 하느님의 거룩한 도덕법과 일치시켜야 한다. “그릇”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행 9:15; 롬 9:22; 고후 4:7에서도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큰 집에는 … 그릇뿐만 아니라 … 그릇도 있어서: 바울은 그리스도인 회중을 “큰 집”에 비하고 회중의 개개인을 “그릇” 또는 “기구”에 비한다. “그릇” 또는 “기구”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성경에서 사람을 가리키는 비유적인 표현으로 자주 사용된다. (행 9:15; 각주; 롬 9:22연구 노트; 살전 4:4연구 노트; 벧전 3:7) 이어지는 구절들(딤후 2:21-26)에서 바울은 이 비유를 사용하여 디모데에게 회중에서 여호와의 원칙을 고집스럽게 무시하는 사람들과 가깝게 지내지 말라고 권고한다.

큰 집에는 … 그릇뿐만 아니라 … 그릇도 있어서: 바울은 그리스도인 회중을 “큰 집”에 비하고 회중의 개개인을 “그릇” 또는 “기구”에 비한다. “그릇” 또는 “기구”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성경에서 사람을 가리키는 비유적인 표현으로 자주 사용된다. (행 9:15; 각주; 롬 9:22연구 노트; 살전 4:4연구 노트; 벧전 3:7) 이어지는 구절들(딤후 2:21-26)에서 바울은 이 비유를 사용하여 디모데에게 회중에서 여호와의 원칙을 고집스럽게 무시하는 사람들과 가깝게 지내지 말라고 권고한다.

그릇: 또는 “도구; 기구”.—딤후 2:20 연구 노트 참조.

그대의 젊음: 이때 디모데는 30대였을 것이며, 그가 사도 바울로부터 훈련을 받은 지도 10년 이상 되었다. 바울이 성경 기록에 처음 나왔을 때 그의 나이는 이때 디모데와 비슷했을 것이다. 행 7:58에서 누가는 사울(바울)을 “젊은이”이라고 부르는데, 그가 사용한 그리스어는 이 구절 즉 딤전 4:12에 나오는 “젊음”에 해당하는 단어와 어근이 같다. 또한 “젊음”에 해당하는 이 그리스어는 「칠십인역」에서 결혼한 성인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기도 했다. (잠 5:18; 말 2:14, 15; LXX) 그리스, 로마 사회에서는 30대인 남자들도 비교적 젊고 아직 성숙하지 않은 사람들로 여겨지는 경우가 있었다. 디모데는 자신이 교훈을 베풀거나 장로로 임명해야 하는 일부 남자들보다 나이가 적었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권위를 행사하기를 다소 주저했을 수 있다. (딤전 1:3; 4:3-6, 11; 5:1, 19-22) “아무도 그대의 젊음을 얕보지 못하게 하십시오”라는 바울의 말은 분명 디모데가 자신감을 갖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성적 부도덕을 피하십시오!: 이 표현에 사용된 그리스어 퓨고는 “피하다; 도망하다”라는 의미이다. 바울은 이 단어를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하여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성적 부도덕에서 도망하라고 강력히 권한다. 일부 학자들은 바울이 요셉에 관한 기록을 염두에 두고 이 표현을 사용했다고 생각한다. 요셉은 문자 그대로 보디발의 아내에게서 단호하게 도망했다. 「칠십인역」에서는 창 39:12-18에 나오는 “도망치다”라는 표현을 번역할 때 이 구절에 사용된 그리스어와 동일한 그리스어를 사용했다. 그리스어 원문에서 고전 6:18에 나오는 권고는 현재 시제로 되어 있으며 그 표현을 직역하면 “피하고 있으십시오”가 된다. 이것은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피하는 것을 의미한다.—「왕국 행간역」(Kingdom Interlinear).

추구하십시오: “추구하다”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추적하다; 뒤쫓다”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될 경우 어떤 것을 이루거나 얻기 위해 애쓰는 것을 가리킨다. 디모데는 바울이 언급한 특성들을 이미 갖고 있었지만, 그 특성들을 계속 기르고 개선해야 했으며 평생에 걸쳐 그 일을 추구해야 했다. 또한 바울은 디모데에게 물질주의의 덫과 같은 악한 것을 피하라고 즉 그러한 것으로부터 도망하라고 권고한다. (딤전 6:9, 10) 바울은 물질주의에 빠지면 해를 입고 경건한 특성들을 기르면 유익을 얻게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디모데에게 물질주의를 피하고 경건한 특성들을 추구하라고 권한 것이다.—마 6:24; 고전 6:18연구 노트; 10:14; 딤후 2:22.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는 표현은 폭넓은 의미를 담고 있으며 단지 하느님의 고유한 이름을 알고 사용하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른다”는 표현은 히브리어 성경과 연관이 있다. 바울이 여기서 인용한 욜 2:32의 문맥을 보면 진정으로 회개하고 여호와의 용서를 신뢰해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어 있다. (욜 2:12, 13) 기원 33년 오순절에 베드로는 요엘의 동일한 예언을 인용하면서 사람들에게 여호와의 승인을 얻기 위해 회개하고 행동을 취하라고 권고했다. (행 2:21, 38) 성경의 다른 구절들을 보면 하느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에는 그분을 알고 그분을 신뢰하며 그분께 도움과 인도를 구하는 것이 포함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시 20:7; 99:6; 116:4; 145:18) 또한 일부 구절들에서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이 그분의 이름과 특성을 선포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창 12:8. 동일한 히브리어 표현이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하다”로 번역된 출 34:5 비교) 롬 10:13의 다음 구절에서 바울은 하느님을 부르는 것과 그분을 믿는 것을 연관 짓는다.—롬 10:14.

깨끗한 마음…에서 나오는 사랑: 이 구절에서 바울은 비이기적인 그리스도인 사랑을 “깨끗한 마음”과 “선한 양심”, “위선이 없는 믿음”과 연관 짓는다. 그리스도인이 마음 즉 속사람이 깨끗하다는 것은 도덕적, 영적으로 깨끗한 것을 가리킨다. 그런 사람은 동기가 순수하며 여호와께 온전히 정성을 바친다. (마 5:8연구 노트) 그러한 깨끗한 마음은 다른 사람들에게 진정한 사랑을 나타내도록 그를 움직인다.

의…를 추구하십시오: 바울은 디모데가 추구해야 할 특성들을 나열하면서 “의”를 가장 먼저 언급한다. (또한 딤후 2:22 참조) 디모데는 이미 헌신한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의롭다고 인정받은” 사람이었다. (롬 5:1) 하지만 그는 여전히 옳고 그른 것에 대한 하느님의 표준을 따르기 위해 최선을 다함으로 의로운 상태를 유지하려고 노력해야 했다.—용어 설명 “” 참조. 또한 엡 6:14 연구 노트 참조.

젊음의 욕망: 디모데는 이 편지를 받았을 때 이미 성인이었으며 아마도 30대였을 것이다. (딤전 4:12 연구 노트 참조) 하지만 바울은 여기서 디모데에게 “젊음의 욕망을 피하라”고, 즉 젊은 사람들이 흔히 느끼는 욕망과 싸우기 위해 자기 징계를 하라고 권한다. (전 11:9, 10) 그러한 욕망에는 부도덕한 성적 욕구도 포함된다. (잠 7:7-23. 고전 6:18 연구 노트 참조) 그러한 욕망은 돈과 권력에 대한 탐욕, 경쟁심, 쾌락을 즐기고 싶은 욕구와 같은 것을 가리킬 수도 있다.—잠 21:17; 눅 12:15; 갈 5:26; 딤전 6:10; 딤후 3:4; 히 13:5.

피하고 … 추구하십시오: 딤전 6:11 연구 노트 참조.

주: 문맥을 볼 때 여기서 “주”는 여호와 하느님을 가리키는 것 같다. (딤후 2:19)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을 히브리어로 옮긴 일부 번역판(부록 다4에 J7, 8, 17, 22로 표기됨)에서는 이 부분에 하느님의 이름을 사용한다.

주를 부르는 사람들: 바울은 디모데에게 동료 그리스도인들과 어울리라고 권하면서 그들을 “주를 부르는 사람들”로 언급한다. (롬 10:13 연구 노트 참조) 그러한 동료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어울리기에 좋은 사람들이었던 이유는 그들이 깨끗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도덕적, 영적으로 깨끗하고 동기가 순수하고 여호와께 온전히 정성을 바치는 사람들이었다. (딤전 1:5 연구 노트 참조) 그들은 디모데가 젊음의 욕망을 피하고 좋은 특성들을 추구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었다.

의…를 추구하십시오: 딤전 6:11 연구 노트 참조.

말 때문에 싸우지 말라고: 바울은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말에 대해 싸우지 말라고 권고한다. 일부 거짓 선생들이 그러한 일을 부추겼던 것 같다. “말 때문에 싸우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말”을 의미하는 명사와 “싸우다”를 의미하는 동사가 합쳐진 것이다. 이 표현은 바울의 편지들보다 이전에 기록된 고대 문헌에는 나오지 않는다. 바울은 디모데 전서에서 이 단어와 어근이 같은 명사를 사용했는데, 그 단어를 직역하면 “말싸움”이 된다. (딤전 6:4 연구 노트 참조) 그러한 싸움은 말의 의미에 대한 사소한 의견 차이 때문에 벌어졌을 수 있다. 하지만 그로 인해 해롭고 매우 심각한 결과가 초래될 수 있었다.

억측: 여기서 바울은 거짓 이야기와 족보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위험한 한 가지 이유를 언급한다. (이 구절에 나오는 거짓 이야기족보에 대한 연구 노트 참조) 한 사전에서는 바울이 사용한 그리스어를 “쓸모없는 추측”으로 정의한다. 다른 참고 문헌에서는 이 표현이 “답을 알 수도 없고 답할 가치도 없는 의문을 갖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바울은 그러한 추측을 “믿음과 관련해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과 대조한다. 따라서 바울은 여기서 믿음을 강화시켜 주는, 확고한 성경적 근거에 기초한 건전한 생각과 추리를 언급한 것이 아니다. (행 19:8; 각주; 고전 1:10) 그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연합시키기보다는 분열시킬 가능성이 높은 헛된 질문과 의심스러운 대답에 대해 경고한 것이다.

헛된 말: 직역하면 “헛된 소리”. 여기서 바울이 사용한 그리스어 표현은 “가치 없는 이야기”를 의미한다. 일부 성경 번역판에서는 이 표현을 “헛된 잡담”, “무의미한 논쟁”으로 번역한다. 그러한 말은 하느님의 말씀에 나오는 확실한 진리가 아니라 추측에 근거해 있었다. 그것은 믿음을 키우는 데 있어서 아무 가치가 없다는 의미에서 헛된 것이었다. (딤전 1:6; 딤후 4:4; 딛 3:9) 더 심각한 문제로, 많은 경우 그러한 잡담이나 논쟁은 거룩한 것에 어긋나는 것 즉 속되거나 불경스러운 것이었다. 그러한 논쟁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말씀에 담긴 진리를 제쳐 두고 사람의 생각을 앞세우는 것이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런 말을 멀리하라고 경고했다.—딤전 4:7연구 노트; 딤후 2:16.

어리석고 무지한 논쟁을 배척하십시오: 바울은 이 편지에서 세 번째로 디모데에게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이 추측에 근거해 있고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문제들에 대해 싸우는 일을 그만두도록 도우라고 권한다. (딤후 2:14연구 노트, 16) 바울은 디모데 전서에서도 그와 비슷한 점을 언급했다.—딤전 1:4; 6:20 연구 노트 참조.

무지한: 바울은 에베소 회중에서 문제가 되고 있던 논쟁을 묘사하는 데 “무지한”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 표현을 좀 더 직역에 가깝게 옮기면 “교육받지 못한”이 된다. 바울이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은 그러한 논쟁을 벌이는 사람들이 아이들조차 알고 있어야 하는 기본적인 그리스도교 가르침을 모르고 있다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해서였을 수 있다. 분명 그들은 사랑을 나타내라는 그리스도의 가장 기본적인 가르침을 적용하지 않고 있었다.—요 13:34, 35.

그리스도 예수의 종: 일반적으로 “종”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둘로스는 남의 소유가 된 사람, 많은 경우 남에게 팔려 종이 된 사람을 가리키는 데 쓰인다. (마 8:9; 10:24, 25; 13:27) 또한 이 단어는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되어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헌신한 종을 가리키기도 한다. (행 2:18; 4:29; 갈 1:10; 계 19:10) 예수께서는 자신의 생명을 대속 희생으로 바치심으로 모든 그리스도인의 생명을 사셨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더는 그들 자신의 것이 아니며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종”으로 여긴다. (엡 6:6; 고전 6:19, 20; 7:23; 갈 3:13)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의 영감받은 편지의 필자들은 모두 회중들에게 교훈을 베풀 때 적어도 한 번 이상 자신이 ‘그리스도의 종’임을 언급했다. 그렇게 함으로 그들은 자신들이 주이자 주인이신 그리스도께 복종한다는 것을 나타냈다.—롬 1:1; 갈 1:10; 약 1:1; 벧후 1:1; 유 1; 계 1:1.

참하느님의 종이 되었고: 또는 “참하느님을 섬기게 되었고”. 여기서 “종이 되다”로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는 다른 사람들, 주로 한 명의 주인을 섬기는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되어 온 정성을 다해 하느님을 섬기는 것을 가리킨다. (행 4:29; 롬 6:22; 12:11) 바울은 “살아 계신 참하느님의 종”이 되면 생명 없는 우상이나 인간이나 죄의 종이 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은 행복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롬 6:6; 고전 7:23. 마 6:24; 롬 1:1 연구 노트 참조.

여러분을 부드럽게 대했습니다: 바울과 동료들은 데살로니가의 형제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영적인 성장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부드럽게 대했다.” (살전 2:8) 하지만 일부 번역판에서는 이 표현을 “여러분에게 어린아이처럼 되었습니다”로 번역한다. 그런 차이가 있는 이유는 이 부분에 “부드럽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에피오이)가 사용된 사본들도 있고 “어린아이들; 어린 아기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네피오이)가 사용된 사본들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어로 이 두 단어는 철자 하나만 다르다. 일부 학자들은 필사자들이 앞 단어에 들어 있는 ‘ㄴ’ 발음에 해당하는 철자를 실수로 한 번 더 썼기 때문에 이런 차이가 생긴 것이라고 설명한다. 문맥과 이 구절에 나오는 젖 먹이는 어머니에 대한 비유를 생각해 볼 때, “부드럽다”에 해당하는 단어가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 것 같다. 많은 현대 번역판에서도 그렇게 번역하고 있다.

가르칠 자격이 있고: 감독자는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 진리와 도덕 원칙을 전해 줄 수 있는, 잘 가르치는 사람이어야 한다. 바울은 디도서에서 감독자가 사람들을 격려하고 권고하고 책망하기 위해 “가르치는 기술을 사용할 때 신실한 말씀을 굳게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딛 1:5, 7, 9연구 노트) 바울은 디모데 후서에서도 “가르칠 자격을 갖추고”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 편지에서 그는 “주의 종”은 자제를 나타내고 자신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을 온화하게 교훈해야” 한다고 말한다. (딤후 2:24, 25) 따라서 감독자는 성경을 사용해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 건전한 교훈을 베풀고,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어야 한다. (마 28:20 연구 노트 참조) 하느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그 자신이 그 말씀을 부지런히 연구해야 한다.

당신의 오른뺨을 때리거든: 그리스어 동사 라피조는 원래 “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 문맥에서는 “손을 편 채로 때리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한 행동을 하는 목적은 아마도 상처를 입히는 것보다는 화나게 하거나 모욕을 주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개인적으로 모욕을 당할 때 보복하지 않고 참아야 한다는 뜻으로 이 말씀을 하신 것이다.

주의 종: 문맥을 볼 때 여기서 “주”는 여호와 하느님을 가리킨다. (딤후 2:19) 히브리어 성경에서 여호와의 숭배자는 여호와의 종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수 1:1; 24:29; 삿 2:8; 왕하 10:10; 18:12) 바울은 디모데를 비롯한 감독자들에게 회중에서 어려운 문제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교훈하고 있다. 바울은 “주의 종”이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 감독자들이 하느님의 교훈을 따라야 하며 그들이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대하는 방식에 대해 하느님께 답변해야 한다는 점을 일깨워 준 것이다. 바울이 여기서 언급한 특성들은 딤전 3:1-7과 딛 1:5-9에 언급된 것들과 함께 감독자들이 갖춰야 하는 특성들이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모든 그리스도인이 “주의 종”이므로 모두가 그러한 특성들을 나타내야 한다.

종: 일반적으로 “종”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남의 소유가 된 사람을 가리킨다. (딛 1:1; 약 1:1. 롬 1:1 연구 노트 참조) 한 참고 문헌은 딤후 2:24에 관해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종이 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지만, 하느님의 종이 되는 것은 매우 영예로운 일이다.”—살전 1:9 연구 노트 참조.

싸우지: “싸우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일반적으로 무기를 들고 또는 맨손으로 싸우는 것을 가리키지만 (행 7:26) 일부 문맥에서는 말로 싸우는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 (요 6:52; 약 4:1, 2) 여기서 바울은 “주의 종”이 말다툼이나 어리석은 논쟁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알려 준다. (딤후 2:14, 16, 23) 주 예수의 온화하고 부드러운 방식을 본받을 때 문제를 더 잘 해결할 수 있다.—마 11:29; 12:19.

모든 사람을 부드럽게 대하고: 바울은 디모데에게 에베소의 다투기 좋아하고 분열을 일으키는 거짓 선생들과는 달리 모든 사람을 부드럽게 즉 친절하게 대하라고 권한다. (딤후 2:23) 이 그리스어 표현은 “모든 사람을 재치 있게 대하고”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바울 자신도 사람들을 부드럽게 대하는 법을 배웠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바울은 유대교 전통에 대한 열심에 사로잡힌 나머지,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부드러움이나 재치나 친절을 나타내지 못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모욕하고 거칠게 대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를 부드럽게 대하셨다. (행 8:3; 9:1-6; 갈 1:13, 14; 딤전 1:13) 바울은 부드러움이 약함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도 배웠다. 그는 잘못된 행동을 하지 말라고 단호하고 솔직하게 이야기하기를 결코 주저하지 않았다. (고전 15:34) 그는 가혹한 태도를 나타내지 않으려고 했으며,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대할 때 재치와 사랑을 나타냈다. (살전 2:8) 바울은 “젖 먹이는 어머니”가 자기 자녀를 대하듯 부드러운 태도를 나타내기 위해 노력했다. (살전 2:7 연구 노트 참조) 그는 디모데가 자신을 본받아, 회중 내에서 분열을 일으키는 그리스도인과 회중 밖의 반대자들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을 부드럽게 대하기를 바랐다. 디모데는 싸움과 분열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회중이 연합되고 사랑 넘친 곳이 되게 해야 했다.—딤후 2:23, 25.

가르칠 자격을 갖추고: 바울은 이전에 그리스도인 감독자들이 갖추어야 할 자격 조건들을 알려 줄 때도 “가르칠 자격을 갖추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를 사용했다. (딤전 3:2 연구 노트 참조) 디모데는 가르치는 부면만이 아니라 회중에서 어려운 문제를 다루는 부면에서도 자격을 갖추고 있어야 즉 능숙해야 했다. 하지만 바울이 사용한 “주의 종”이라는 표현은 장로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참그리스도인들은 능숙하게 가르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히 5:12 비교.

해를 당할 때에도 참고: 이 표현은 화를 내지 않고 “악을 참다”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복합어를 번역한 것이다. “주의 종”은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 악을 악으로 갚으려 하지 않고 참을성 있게 인내해야 한다. (롬 12:17) 디모데는 동료 그리스도인들이 그를 부당하게 대할 때 이 특성을 나타내야 했다. 바울은 이 편지의 뒷부분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이 박해를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딤후 3:12) 따라서 “해를 당할 때에도 참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특성이다.—마 5:39 연구 노트 참조.

모든 사람을 부드럽게 대하고: 바울은 디모데에게 에베소의 다투기 좋아하고 분열을 일으키는 거짓 선생들과는 달리 모든 사람을 부드럽게 즉 친절하게 대하라고 권한다. (딤후 2:23) 이 그리스어 표현은 “모든 사람을 재치 있게 대하고”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바울 자신도 사람들을 부드럽게 대하는 법을 배웠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바울은 유대교 전통에 대한 열심에 사로잡힌 나머지,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부드러움이나 재치나 친절을 나타내지 못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모욕하고 거칠게 대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를 부드럽게 대하셨다. (행 8:3; 9:1-6; 갈 1:13, 14; 딤전 1:13) 바울은 부드러움이 약함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도 배웠다. 그는 잘못된 행동을 하지 말라고 단호하고 솔직하게 이야기하기를 결코 주저하지 않았다. (고전 15:34) 그는 가혹한 태도를 나타내지 않으려고 했으며,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대할 때 재치와 사랑을 나타냈다. (살전 2:8) 바울은 “젖 먹이는 어머니”가 자기 자녀를 대하듯 부드러운 태도를 나타내기 위해 노력했다. (살전 2:7 연구 노트 참조) 그는 디모데가 자신을 본받아, 회중 내에서 분열을 일으키는 그리스도인과 회중 밖의 반대자들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을 부드럽게 대하기를 바랐다. 디모데는 싸움과 분열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회중이 연합되고 사랑 넘친 곳이 되게 해야 했다.—딤후 2:23, 25.

온화: 그리스도인이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다른 사람을 대할 때 나타내는 내면의 차분함과 평온함을 가리킨다. (갈 6:1; 엡 4:1-3; 골 3:12) 온화는 하느님의 영의 열매를 이루는 특성 중 하나이므로 단순히 의지력만으로 기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께 가까이 가고 기도로 그분의 영을 구하고 그 영의 영향력에 순응함으로 온화를 기를 수 있다. 온화한 사람은 겁쟁이나 나약한 사람이 아니다. “온화”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프라이테스는 힘을 겸비한 부드러움 또는 제어되고 있는 힘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단어와 어근이 같은 그리스어 프라이스는 “성품이 온화하다”, “온화하다”로 번역되었다. (마 21:5; 벧전 3:4) 예수께서는 자신이 성품이 온화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셨다. (마 11:29) 하지만 그분은 결코 나약한 분이 아니셨다.—마 5:5연구 노트 참조.

그대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 바울이 사용한 그리스어는 이 문맥에서 그리스도교 가르침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거나 그 가르침을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바울은 특히 에베소 회중 내에서 성경의 교훈이나 인도하는 형제들의 권고를 따르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이 말을 했을 수 있다.

온화하게 교훈해야: 이 문맥에서 “교훈하다”로 번역된 단어는 “바로잡다; 지침을 베풀다”라는 뜻을 담고 있을 수 있다. 한 참고 문헌에 따르면 이 단어는 다른 사람이 올바른 선택을 하는 능력을 기르도록 돕는 것을 의미한다. “주의 종”은 그러한 교훈을 “온화하게” 즉 겸손하고 온유한 태도로 베풀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 “모든 사람을 부드럽게 대할” 수 있을 것이다.—딤후 2:24연구 노트. 또한 갈 5:23 연구 노트 참조.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셔서: 그리스도인 장로가 그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을 온화하게 시정하거나 교훈하면 그들이 회개하는 즉 “생각을 바꾸는” 좋은 결과가 있을 수 있다. (용어 설명 “회개” 참조) 그러한 생각과 태도의 변화는 사람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가져오시는 것이다. 그분은 고집 센 태도를 나타내던 그리스도인이 그처럼 중요한 변화를 하도록 도와주신다. 바울은 이어서 그러한 회개가 가져오는 좋은 결과 몇 가지를 언급한다. 회개한 죄인은 진리를 더 정확하게 알게 되고 정신을 차려 사탄의 올무에서 벗어나게 된다.—딤후 2:26.

정신을 차려: 여기서 바울이 사용한 그리스어는 문자적으로 “(취한 상태에서) 깨어나다”를 의미한다. 고린도의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을 부정하는 것과 같은 배교적인 가르침에 귀를 기울였기 때문에, 영적으로 볼 때 마치 술 취한 사람처럼 방향 감각을 잃고 혼란스러워하는 상태 즉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 있었다. 따라서 바울은 그들에게 정신을 차리라고, 다시 말해 부활에 대한 가르침을 명확하게 이해하여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벗어나라고 권고한다. 그들은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 있다가 영적으로 병에 걸리거나 죽음에 이르기 전에 신속히 그렇게 해야 했다.—고전 11:30.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날지도: 바울의 말을 볼 때 회중의 일부 사람들이 ‘마귀의 올무’에 걸려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마귀에게 속아 진리에서 벗어남으로 그의 올무에 걸려들었던 것 같다. (딤후 2:18, 23, 25) “마귀에게 사로잡혀 그의 뜻을 행하고 있다”는 표현에는 마귀가 거짓말을 사용해 그들이 알아채지 못하게 사로잡았다는 뜻이 담겨 있을 수 있다. 사탄은 그들을 죽인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목적에 따라 행동하도록 그들을 조종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처럼 올무에 걸려든 사람들을 “온화하게” 교훈하여 그들이 “정신을 차리게”(직역하면 “[취한 상태에서] 깨어나게”. 고전 15:34 연구 노트 참조) 하라고 권고했다. 그들이 회개하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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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수감된 상태에서도 확고함을 유지하다
바울이 수감된 상태에서도 확고함을 유지하다

바울은 로마에 두 번째로 수감되어 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딤후 4:6) 게다가 데마를 비롯한 몇몇 동료들은 그를 버렸다. (딤후 1:15; 4:10) 하지만 바울에게는 행복하다고 느낄 만한 이유가 있었다. 몇몇 용기 있는 형제들이 바울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그를 지원해 주었다. (딤후 4:21) 예를 들어, 오네시보로는 바울을 만나기 위해 로마 곳곳을 찾아다녔다. (딤후 1:16, 17) 바울은 수감된 상태에서도 확고함을 유지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하늘 왕국”에 그를 위해 예비되어 있는 상에 초점을 맞추었다. (딤후 4:8, 18) 바울은 이 힘든 시기에도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는 감옥에서 디모데에게 보내는 두 번째 영감받은 편지를 써서, 그가 계속 충실을 유지하도록 격려했다.—딤후 1:7, 8; 2:3.

큰 집에 있는 그릇들
큰 집에 있는 그릇들

부유한 로마 사람의 집에는 여러 가지 그릇이나 기구가 있었다. 부엌에서 종들은 청동이나 진흙으로 만든 냄비나 팬을 사용했다. 포도주나 올리브기름 같은 액체를 저장하는 데는 더 큰 토기 주전자나 암포라를 사용했다. 식사를 할 때는 색유리나 청동이나 은이나 진흙으로 만든 그릇들이 사용되었다. 그런가 하면 쓰레기통이나 요강과 같이 덜 귀하게 사용되는 그릇들도 있었다. 성경에서는 그릇이 사람을 가리키는 비유적인 표현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행 9:15) 바울은 그리스도인 회중을 “큰 집”에 비하고 회중의 개개인을 “그릇” 또는 “기구”에 비한다. “귀하게 쓰이는” 그릇을 “귀하게 쓰이지 않는” 그릇과 따로 보관해야 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회중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불결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과 가깝게 지내서는 안 된다.—딤후 2:20, 21.